-산을 만나면 산을 넘고 강을 만나면 강을 건너길.
20대 초반 신발공장 미싱공이었던 나는 낮에는 공장에서 미싱을 밟고 밤에는 야학에서 대학생 언니 오빠들에게 근로기준법과 장구와 꽹과리를 배웠다.
그리고 한 달에 두 번 쉬는 날이면 그들과 가까운 곳으로 소풍을 가거나 소주에 새우깡 나눠 먹으면서 당시 유행하던 노동가요를 부르면서 고단한 일상을 달래기도 했다.
어떻게 된 것인지 그때 불렀던 '타는 목마름'이라든지 '꽃다지'를 비롯한 몇몇의 노래들은 가사 하나 틀리지 않고 정확하게 기억을 하고 있다.
그중에 내가 제일 좋아했던 노래는 ‘나이 서른에 우리’였다.
[나이 서른에 우린 어디에 있을까
어느 곳에 어떤 얼굴로 서 있을까
나이 서른에 우린 무엇을 사랑하게 될까
젊은 날의 높은 꿈이 부끄러진 않을까
우리들의 노래와 우리들의 숨결이
나이 서른엔 어떤 뜻을 지닐까
저 거친 들녘에 피어난 고운 나리꽃의 향기를
나이 서른에 우린 기억할 수 있을까
우리들의 만남과 우리들의 약속이
나이 서른엔 어떤 뜻을 지닐까
빈 가슴마다 울러나던 참된 그리움의 북소리를
나이 서른에 우린 들을 수 있을까]
내가 그 노래를 좋아했던 이유는 투쟁적이고 비장한 노래보다 이 노래를 부르고 있으면 그냥 위안이 되었고
혁명이나 해방이 아닌 소망을 갖게 했다.
하루 16시간 미싱 앞에서 잔업과 철야를 밥 먹듯 하지 않아도 제발 소원이었던 하루 6시간 이상을 푹 자고 일어나도 괜찮은 인생. 그런 소망말이다.
이십 대 초반. 내가 꿈꾸었던 소망은 고작 그런 것들이었다.
얼음물에 머리 감지 않아도 되는 한겨울날의 온수.
설탕물 대신 허기를 달랠 수 있는 맛있는 야식.
혁명이나 해방 앞에 너무 소소하고 보잘것없었던 나의 소망을 나이 서른에 우리를 함께 불러주었던 이들은 응원하고 격려해 주었다.
하지만 '내 이름은 공순이가 아니고 미경이다'라고 팔뚝에 유서를 쓴 아이가 공장 옥상에서 떨어져 죽은 날.
함께 소소한 서른의 꿈을 꾼 우리는 뿔뿔이 흩어질 수밖에 없었고, 언제부터인가는 소원해진 관계마저 끊어졌다. 이십 대에는 미처 알지 못했던 시절인연에 가슴 아파하며 이십 대를 보냈다.
열이 펄펄 나는 아이의 몸을 물수건을 닦아주면서 서른의 첫날을 맞았다.
나이 서른에 나는 돌이 지난 아이를 혼자 키우는 미혼엄마가 되었다.
그리고 서른이 된 일주일 뒤에 나의 우주 같았던 김광석이 죽었다.
나의 세상은 더 암울했고, 세상은 그렇게 바뀌어진 것 같지 않았고, 앞으로도 바뀌지 않을 것 같았지만 열이 떨어진 아이가 회복된 것만으로 충분한 것 같았다.
무엇보다 이젠 따뜻한 물에 머리도 감을 수도 있게 되었고 한 달에 한두 번은 고기를 먹을 수 있게 되었으니 나이 서른에 나는 스물 때보다 훨씬 괜찮아졌다고 위로하면서 서른을 맞았다.
나에게는 혁명이나 해방이나 소망보다 더 소중한 아이가 있으니 괜찮다. 괜찮다. 괜찮다. 라며 나를 다독였다.
인생은 나의 계획과 바람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그것이 당연한 건데 당연히 미처 알지 못했던 시절이었다.
문제는 더 어려워졌다.
그러고 보니 나이 스물에 나는 겨우 덧셈. 뺄셈 문제 앞에 있었고 서른에는 곱셈. 나눗셈을 푸느라 정신이 없었던 것 같다.
세상에 이렇게 어려운 문제가 있을 수 있을까. 도대체 답이라는 것이 있는 문제있은 것인가. 머리카락 쥐어뜯어가며 치열하게 문제 앞에 있다 보니 어느새 나도 모르게 어라 하면서 문제가 해결된 적이 많았다.
이 문제를 풀고 나면 이젠 좀 괜찮아지겠지 했는데 웬걸 미적분과 함수가 떡하니 기다리고 있는 게 아닌가.
그런데 이젠 덧셈. 뺄셈. 곱셈. 나눗셈 정도는 식은 죽 먹기가 되었다.
그때의 훈련이 있었기에 미적분과 함수를 풀 수 있는 실력이 된 것이다.
그렇듯 나에게 일어난 모든 사건. 사고. 원하지 않았던 에피소드. 예상하지 못했던 고난들이 모두 내 인생에 필요한 것들이었음을 내 딸아이가 서른이 훌쩍 넘어가는 동안 알게 되었다.
내 인생의 모든 순간들이 지금 나의 인생에게 필요한 재료들이었고, 지금의 순간 역시 마찬가지임을 믿는다. 버릴 것이 하나도 없는 인생이라는 것을 믿기에 흥미진진한 인생인 것이다.
매주 목요일 오후 3시.
수업을 마친 15살부터 21살까지 13명의 아이들이 모여 인형극 연습을 한다.
중학생인데도 나이가 천차만별인 이유는 각자의 이유와 사연이 있기 때문이다.
며칠 전에는 자신의 모습을 그려보고 꿈을 발표하는 시간을 가졌다.
감사하게도 아이들에게는 꿈이 있었다.
의사가. 군인이. 간호사가. 선생님이. 한 아이는 대통령이 되고 싶다고 했다.
나는 아이들에게 '공부 열심히 해야 되겠네.'라고 응원을 했지만 과연 교과서도 노트도 변변한 필기도구도 없이 공부하는 이 아이들 중 고등학교에 진학할 수 있는 아이들이 몇이나 있을까 씁쓸해진다.
1학년을 마치고 2학년이 되는 과정이 당연한 것인데 이 아이들에게는 당연하지 않다.
그렇기에 20살이 훌쩍 넘어서라도 중학생이 되는 것이 행운이고 감사인 것이다.
문득 오래전, 나이 서른에 우리를 함께 불렀던 나의 시절이 생각이 났다.
나이 서른에 이 아이들은 무엇을 하고 있을까?
비록 의사가 군인이 간호사가 선생님이 대통령이 되어 있지 못할지라도 자신 앞에 놓인 문제들을 잘 풀어갔으면 좋겠다.
산을 만나면 산을 넘고, 강을 만나면 강을 건너는. 도망치치 않는 그런 청춘들이 되었으면 좋겠다.
각기 다른 모양의 서른을 맞이하겠지만 옳고 그른 정답이 없는 인생의 과정. 과정에서 만난 문제 앞에 자신만의 방법으로 문제를 풀고 답을 찾아갈 수 있기를.
부디 지금의 순간들이 아이들의 서른에 따뜻한 추억의 자양분이 되기를 간절히 바라보는 요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