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사해서 다행이야

1월의 글, <상실>에 대하여

by 그늘의 끝








단발의 아줌마 파마를 한 학생주임은 팔짱을 낀 채 창 밖을 내다보며 “사람이 참 간사해”라고 새침하게 말했다. 창 너머에 시선을 둔 얼굴은 반쯤 웃었고 반쯤 쓸쓸했다. 그녀는 자주 마음이 간사해지는 사람이었고, 나는 반은 웃음이고 반은 슬픔인 그 고백이 좋았다. 표정에선 슬픔의 무게 추가 더 나가 보였으나 목소리엔 안심, 안도 같은 것이 깔려있었다. 졸업 때까지 정확한 의미도 모른 채, 주저앉았다 일어날 일이 있으면 그 말을 따라 하곤 했다. ‘으휴, 사람 참 간사해.’ 그 말을 내뱉는 고등학생의 얼굴에는 쓸쓸함이 서툴러 웃음만이 돋보였다.




나는 전보다 그 웃픈 고백을 좀 더 그럴듯하게 말할 수 있게 되었다. 무언가를 놓치거나 잃거나 본래 없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하거나, 그런 일련의 사건들은 객관적 크기와 상관없이 무력과 상실을 경험하게 했다. 크고 작은 일들 속에서 소박한 후회와 괴로움 또는 과분한 절망과 슬픔의 나날을 보내기도 했다. 그러다 내 안의 회복열차는 어느 시점에 느닷없이 내게 귀띔한다. 자각할 만큼 준비가 되었다고, 그 동안 수고했다고 그러니 내일은 좀 다르게 살 수 있을 것 같다고. 좀 전까지의 어두운 얼굴과 힘없던 목소리,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던 지난밤과 지난 날을 수놓은 술병과 욕지거리 그런 것들이 한 순간에 명분을 잃는다. 그리고 찾아오는 의외의 발견과 미소한 변화, 그 틈으로 밀려드는 희망에 나는 다시 일어설 준비를 한다. 이 변심이 얼마나 가소롭고 간사해 보이는지, 내 자신이 퍽 우습고 초라해진다. 가슴에 스멀스멀 퍼지는 안도와 온 몸으로 느껴지는 내일에 대한 기대가, 얼굴에 빤히 드러나는 게 부끄러워 되려 냉소적인 웃음을 짓게 된다. ‘나도 참, 살겠다고.’ 덕분에 ‘인간은 간사하다’는 명제를 처음 마주한 시절엔 반도 모르던 그 말을 조금은 알 것 같은 얼굴이 되었다.




‘나는 이미 회복의 궤도 위에 있다’는 신호는 삶에 대한 내 숨은 집념을 완전하게 까발린다. 궁색함에 헛웃음이 나고 씁쓸한 기분이 들지만 삶에의 애정과 일념으로 이루어진 본능을 인정할 수 밖에 없다. 저 홀로 회복의 한 가운데까지 나를 데려가 불쑥 놀라게 한다. 이미 여기까지 달려와 놓고 아닌 체 한 거라면 스스로가 의뭉스러우나, 자각조차 못했다니 더 어처구니가 없다. 그 진행이 두드러지지도 뚜렷하지도 분명하지도 않아서 알아채지 못했다 자위할수록 본능이란 존재가 더욱 선명하게 드러난다. 지나치게 솔직하고 거리낌 없이 드러난 이 본능은 상실로 가라앉아 있던 내게 감당하기 어려운 심적 압박이 된다. 내 안에 이렇게 대단한 것이 살아있었다는 사실이, 그로 인한 현재의 결과가 매우 버겁게 다가오는 것이다. 지금 눈앞의 희망을 내 것이라 생각해도 될까? 내게 그럴 자격이 있나? 거저먹는 기분이어도 괜찮은 걸까? 이로써 다시 살아봐도 되는 걸까? 그저 좋다고 함박웃음 지으며 박수만 치기엔 마음이 영 찝찝하다. 그러면서도 어느새 살았구나 안심을 하고, 세상이 달라 보이고, 새로이 다짐을 한다. 다시 시작한다고 말하기엔 갸륵하게도 삶에 대한 본능은 멈춘 적이 없다. 지독한 삶의 동력이 계속되는 가운데 이 본능을 직시하는 순간, 이전과 크게 다르지 않지만 전혀 같을 수는 없는 다음의 생이 시작된다.




애벌레는 번데기가 되기 위해 여러 번의 탈피를 거쳐야 한다. 우습게도 아무리 껍질을 찢고 나오는 이 고된 과정을 거친다 해도 최종 번데기 단계에 이르기 전까지는 계속 껍질만 다른 애벌레일 뿐이다. 밖에선 탈피 과정의 애벌레에게 어떤 변화도 없어 보이지만 그 안의 본능은 삶을 위한 단계를 하나씩 넘어서고 있다. 그 과정은 모든 자연이 그렇듯 조용하지만 분명하고, 자연스러우며 아름답다. 우리의 본능 역시 그들의 생태와 다르지 않다. 끈질기며 은밀하지만 숭고한 아름다움이 담긴 순리다.


‘사람 참 간사해’ 그 고백이 다행스럽다. 상실의 틈에서 매 희망을 발견하는 내 모습이 불편하게 느껴질 때, 결국 삶을 향한 그 묵직한 본능 덕에 우리는 영원히 삶을 잃지 않을 수 있다. 이렇게 우린 내일을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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