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가 인생의 전부는 아니잖아요!
요즘 들어 부쩍
아들이 자기 방에 혼자 있는 시간이 늘었다.
나는 가끔 소파에 앉아 꾸벅꾸벅 졸다가, 문득 시계를 본다.
어느덧 새벽 1시.
그런데도 닫혀 있는 아들 방 문틈 사이로
불빛이 새어 나오면,
나는 조용히 다가가 그 불빛을 바라본다.
책상 앞에 앉아 문제집을 펼치고,
펜을 돌리다 멈추고,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다 다시 내려놓는 모습.
지금껏 잘 보지 못했던 장면이다.
중학교 1학년까지는 그냥 마음껏 놀라고 내버려두었다.
초등학교 2학년까지 친구를 사귀는 데 어려움을 겪은 아들이라,
무언가를 억지로 시키기보다는
스스로 회복할 시간을 주고 싶었다.
나는 사람의 인생에는
각자 감당해야 할 몫의 시간들이 있다고 믿는다.
놀아야 할 시간,
사랑받아야 할 시간,
헤매야 할 시간,
그리고 결국 마주해야 하는 고통의 시간까지.
그 시간을 제때, 충분히 살아내지 못하면
삶의 다음 구간 어딘가에서
뒤늦은 허기처럼 그것이 불쑥 튀어나오곤 한다.
나는 이걸 ‘일생총량의 법칙’이라 부르고 싶다.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어떤 감정과 경험을 일정량 품고 살아가야 하며,
그 시간을 채우지 못한 채 서두르면
마치 덜 익은 과일처럼
삶이 어느 순간 푸석해진다.
그래서 나는 아들이 ‘놀아야 할 시간’을
충분히 누릴 수 있도록 했다.
공부는 잠시 멀리 있어도 괜찮다고,
그렇게 쉼의 총량을 채우는 시기라고 스스로를 설득하며.
하지만 시간이 길어질수록
아이는 점점 더 ‘공부는 나와는 먼 일’이라는 태도를 갖게 되었고,
중학교 2학년이 되자
시험이라는 현실적인 부담이 밀려들었다.
이미 다른 아이들은 초등학교 때부터 다닌 학원,
익숙한 방식, 누적된 성취를 갖고 있었고,
아들은 이제 막 출발선 앞에 서 있었다.
중학교 시절을 힘겹게 통과하고
고등학교 1학년이 되었을 무렵,
처음 맞은 중간고사 결과는
아이에게 꽤 충격이었던 모양이다.
“생각보다 너무 못 봤어.”
툭 내뱉은 한마디였지만,
그건 결과에 대한 실망이라기보다
자신에 대한 자각처럼 들렸다.
그리고 기말고사를 한 달도 넘게 남겨둔 어느 날부터
아이는 조용히 책상에 앉기 시작했다.
나는 그 모습이,
결과와는 무관하게 참 좋았다.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자기 안에서 무언가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
공부를 좋아해서가 아니라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감각.
그 감각이,
그 스스로의 움직임이 무엇보다 소중해 보였다.
한편, 둘째 나티는
오빠와는 또 다른 방향에서
자신만의 시간을 만들어가고 있었다.
작년부터 제과제빵에 흠뻑 빠져 있었다.
주말마다 학원에서 빵을 굽고 쿠키를 만들었고,
집에 와서도
“이번엔 레몬글레이즈를 넣어볼까?” 하며 레시피를 뒤적였다.
오븐 앞에서 반죽이 부풀어 오르길 기다리는 눈빛은
말하지 않아도 충분히 설명이 되는 표정이었다.
수학과 영어학원을 함께 다니는 딸은,
영어는 제법 잘하지만
수학은 좀처럼 손에 잡히지 않는 눈치였다.
그래서 하루는 조심스럽게 물어보았다.
“수학, 재미없어?”
나티는 잠깐 망설이다가 말했다.
“응. 그래도 학원은 계속 다닐 거야.”
그 말은 수학이 좋아서라기보다는
그래도 학원 정도는 다녀야 하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두려움에서 나온 듯했다.
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서 붙잡고 있는 마음.
그 마음이 왠지 짠했다.
언젠가 수학학원 원장 선생님에게 전화가 왔다.
“나티가 숙제를 자주 안 해오고 늦게 오는 날도 있어요.
그래서 제가 야단을 좀 쳤더니, 이렇게 말하더군요.
‘공부가 인생의 전부는 아니잖아요.’ 라고요.”
그 말을 들었을 때, 머리가 띵했다.
그 짧은 문장 하나에
아이의 감정, 자존심, 혼란, 단념 같은 것들이
한꺼번에 엉켜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러면서 두 가지 생각이 동시에 떠올랐다.
하나는,
선생님이 어떤 어조로, 어떤 방식으로 지적했기에
아이가 그렇게 받아들였을까?
어른이 곁에 없을 때 아이들이 마주하는 세계는
우리가 아는 것과 전혀 다를 수 있으니까.
다른 하나는,
혹시 내가 너무 일찍
아이를 ‘하고 싶은 일’에 몰두하게 내버려둔 건 아닐까?
너무 빠르게 좋아하는 것을 만나
너무 빨리 ‘싫은 일’로부터 멀어지도록
허락해버린 건 아닐까?
물론 제과제빵을 단지 놀이처럼 여기지 않도록
책임감도 가르치고 싶어 학원에 보낸 건 맞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나티는 그 세계에 더 빠져들었고,
자기 세계를 가진 사람처럼 보이게 됐다.
그 자체로 대견했지만, 한편으로는 걱정도 됐다.
‘나는 이걸 할 줄 아니까, 다른 건 안 해도 돼.’
이런 생각이 너무 일찍 자리 잡아버린 건 아닐까.
그 생각이 마음속에 오래 남았다.
나는 항상 아이들이 최대한 빨리
자신의 관심사를 찾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왔다.
그리고 그것을 지원한다고 믿었다.
하지만 아직도 공부라는 것에서
엄마인 나조차 완전히 자유롭지 않다는 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세상은 늘 고통과 함께 온다.
공부라는 이름이 아니더라도
어떤 형태로든 삶은 우리 앞에 고통을 내려놓는다.
그리고 그 고통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인생을 대하는 태도가 결정되며,
결국 그 사람의 삶의 방향이 달라진다.
아이들은 지금 ‘공부’와 ‘시험’이라는
작고도 큰 고통을 지나고 있다.
그건 학생이라는 이름으로
어쩔 수 없이 걸어야 하는 인생의 통과의례 같은 것이다.
나는 공부라는 고통이
꼭 좋은 성적으로 해소돼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흔히,
열심히만 하면 결과가 따라올 거라고 믿지만,
그 믿음이 언제나 현실과 맞닿는 것은 아니니까.
그리고 목표 없는 좋은 성적이
아이에게 느긋한 만족감을 줄 것이라는
확신도 없기 때문이다.
중요한 건,
스스로 공부를 해보는 것.
그리고 혹시 결과가 좋지 않더라도
왜 그런지를 원인을 고민하고
다시 방향을 잡아보는 경험.
그럼에도 여전히 성적이 기대에 미치지 못할 수도 있다.
자존심이 상하고,
스스로에게 실망하는 고통을 마주할 수도 있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그런 순간들을 지나면서도
스스로를 믿고 꿋꿋이 다시 일어서는 경험은
아이들을 더 깊고 단단한 사람으로 만들어줄 것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도,
나는 아이들의 곁에서 조용히 바라본다.
그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자신만의 길을 만들어가기를.
이 모든 시간이
‘잘 지나왔노라’ 웃으며 말할 수 있는
총량의 한 시절이 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