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고등학생 아들이 아닌, 중학교 2학년 딸과의 이야기다.
딸 나티는 2월부터 대구에 있는 제과제빵학원에 매주 토요일, 일요일을 다니고 있다.
나티가 제과제빵에 흥미를 보이기 시작한 건, 지난가을 교육청이 주관한 10회의 무료 제과제빵 수업에 참여하면서부터였다. 수업이 끝날 때마다 집으로 들고 온 쿠키며 머핀은 생각보다 훨씬 정갈했고, '어? 제법인데?' 싶을 만큼 완성도도 있었다. 나는 진심 반, 초심자의 행운일지도 모른다는 마음 반으로 칭찬을 건넸다.
하지만 그 이후에도 나티는 블로그와 유튜브로 독학하며, 집에 있는 에어프라이어로 이것저것 만들어냈다.
매번 결과물이 나쁘지 않았고, 마침 내가 예전에 샀던 오븐과 믹서기를 친정집에서 가져와 베란다에 미니 키친을 마련해 주자, 그녀의 베이킹 열정은 더 활활 타올랐다. 일주일에 3~4번씩 굽는 열정에 재료들을 사다 나르느라 허리가 휘청거렸다.
이쯤되자, 이제는 잠시 스치는 취미로만 보기에는 그 마음의 크기가 더 크다는 판단이 들었다.
결국, 기왕 시작한 거 좀 더 제대로 배워보자며 전문 학원에 다녀보는 게 어떻겠냐고 권유했다. 2개 클래스를 6개월간 다니는 데에만 500만 원이 들었지만 기꺼이 감수하였다. 배우는 것을 좋아하는 내 철학이다.
기왕 배울 거라면 기본기 있고 실력이 좋은 선생님에게서 배울 것!
유튜브로도 배울 수 있는 것들이 많지만, 내가 굳이 오프라인의 학원을 다니라고 권한 이유가 있다.
첫째, 기초부터 제대로 배울 수 있고, 둘째, 유튜브로는 배울 수 없는 위생 개념을 학습하게 되며,
셋째, 베이킹은 설거지와 마무리까지 포함된다는 걸 체험하길 바랐기 때문이다.
나티는 결과물엔 몰두하지만, 뒤처리는 자주 빠뜨리곤 했다.
한창 재미있는 것을 하는 데에 찬물을 끼얹는 것이 싫어서 한동안 설거지를 강요하진 않았지만,
어느 정도 베이킹하는 데 안정기에 들어서자 이제는 자신이 했던 일에는 끝까지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을 알려줄 차례였다.
그러나 마음 한구석에는 살짝 걱정도 있었다.
혹시 좋아하는 활동에 부담을 얹으면 흥미가 식지는 않을까?
귀찮은 과정이 자칫 열정에 찬물을 끼얹게 되지는 않을까?
하지만 그런 우려는 기우였다.
놀랍게도 그 이후로 단 한 번의 결석도 없이 성실히 학원에 다닐 뿐만 아니라,
여전히 평일에도 두 번은 집에서 베이킹을 할 만큼 변함없는 열정을 보여주고 있으니 말이다.
이번 6월에 치른 케이크 아이싱 시험에서 만점을 받았다는 사실을 하원하는 학원 친구들로부터 전해 들었다. "나티 어머니! 나티가 우리 반에서 제일 베이킹 잘해요!"
고맙게도 같은 것을 배우는 입장에서도 질투심 하나 없이 기꺼이 축하해주는 모습이 참 보기 좋았다.
그런 친구들이 옆에 있다는 사실도 고맙고 든든했다.
듣자 하니 그 수업을 맡은 선생님이 가르친 수많은 학생들 중에서
만점을 받은 경우는 나티가 처음이라고 했다.
그날 저녁, 나티와 마주 앉아 식사를 하면서 슬쩍 물어봤다.
"오늘 시험 어땠어?"
나티는 마치 그 질문을 기다렸다는 듯이 "나 백점 받았어!"라고 활짝 웃으면서 흠흠 거리며 말했다.
그래, 너는 충분히 우쭐해 할 자격이 있다는 걸 엄마는 알고 있지.
이 결과 뒤에는 얼마나 많은 연습과 몰두가 있었는지를.
아직 제과제빵을 진로로 정한 것은 아니지만,
좋아하는 일을 꾸준히 하며 성취를 경험한다는 것만으로도
미래에 대한 막연함을 조금은 덜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성취가 아이의 자존감을 어떻게 자라게 하는지를 옆에서 지켜보며,
나 역시 부모로서 새로운 기쁨을 경험하고 있다.
올해 하반기에는 나티와 함께 베이킹과 관련된 작은 프로젝트도 계획하고 있다.
단순한 결과물이 아니라, 그 과정을 통해 나누는 이야기, 실패하고 웃는 장면,
다시 도전하는 자세까지도 모두 소중하게 기록될 것 같다.
어쨌든, 그날도 학원에 데려다주기 위해 운전 중이었다.
큰 도로를 달리고 있는데, 골목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차량이 ‘빵! 빵!’ 클랙슨을 울렸다.
상황상 분명 내가 우선이었고, 상대는 잠시 기다려야 하는 입장이었다.
나는 놀랐지만 룸미러와 사이드미러를 통해 뒤 따라오는 차가 없음을 확인한 후 천천히 비켜주었다.
사실, 굳이 비켜줄 필요는 없었지만,
너무나 비상식적인 행동이라 혹시 급한 사정이라도 있는걸까 싶었기 때문이다.
그보다 나는 조수석 뒤에 앉아 있던 딸이 혹시 놀라진 않았을까 걱정되었다.
다행히 나티는 침착했고, 오히려 그 차에 대해 "저 차 왜저러는데?!"라며 불쾌함을 표했다.
아이 역시 엄마가 놀란 건 아닐까 걱정했던 것 같다.
그 순간,
딸에게 말해줘야겠다고 느꼈다.
"나티야, 저렇게 갑자기 클랙슨을 울리면 순간적으로 놀라잖아.
어떤 사람은 그때 급하게 핸들을 꺾기도 하는데, 그러다 뒷차나 보행자를 칠 수도 있어.
누군가 아무리 나를 도발해도, 일단 내 주변을 먼저 살피고,
그 요구를 들어줘도 괜찮은 상황인지를 먼저 확인하는 게 중요해."
아이는 "음~" 하며 내 말을 곱씹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너무 자주 감정에 반응하며 살아간다.
화내는 사람에게 화내고, 밀치면 밀친다.
그런데 그런 반응은 상황을 바꾸지 못하고, 오히려 나를 다치게 할 수 있다.
누군가 거칠게 다가올 때, 그 감정까지 내가 짊어질 필요는 없다.
상대의 분노가 나의 사고로 이어지는 일이 없어야 한다.
감정은 전달되지만, 그 감정에서 살짝 한발짝 뒤로 물러나 거리를 두는 것과
그에 대한 태도는 연습을 통해 다져져야 한다.
그리고 그 연습은 일상에서 조금씩 실천해 나갈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나는 요즘,
아이들에게 ‘판단력’이라는 단어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새삼 느낀다.
특히 사회 곳곳에서 터져 나오는 안타까운 사건들을 접할 때마다, 그 필요성은 더욱 절실해진다.
2014년 세월호 참사 역시 그런 사례였다.
어른들의 지시에 따라 탈출하지 않고 배 안에 머무른 수많은 아이들.
그 비극은 단지 구조의 실패만이 아니었다.
'판단'할 기회를 빼앗긴 교육,
'질문'하지 않는 문화,
'복종'을 미덕이라 여긴 사회가 만든 참사였다.
누군가의 지시나 다수의 의견에 무조건 따르기보다는,
자신의 감각과 생각으로 상황을 바라보고 판단할 수 있는 힘.
그 힘은 단지 공부로만 키워지지 않는다.
삶 속 작은 순간들, 질문하고 고민하는 연습에서 자란다.
그래서 나는 아이에게 자주 묻는다.
“넌 어떻게 생각해?”
“그 상황이면 넌 어떻게 했을 것 같아?”
그 질문을 통해 아이가 스스로 말하고, 내 생각과 다를 수 있음을 받아들이는 연습을 함께 해 나간다.
실수해도 괜찮고, 틀려도 괜찮다고 말해주는 것.
아이의 판단력은 그렇게 조금씩 자라나는 것이다.
차 안에서 느닷없는 클랙슨 소리에 놀라지 않고 반응하는 법,
불쾌한 감정이 밀려와도 흘려보내는 연습,
그리고 어느 날 마주할 수도 있는 예기치 않은 상황에서도
조금은 중심을 잡고 자기 감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법.
이 모든 것이 결국, 아이를 삶에 더 단단히 서게 해주는 힘,
그리고 스스로 삶을 판단하고 선택하게 해주는 힘이 아닐까.
나는 오늘도 그런 연습을 함께하는 부모이고 싶다.
그래서 나는 아이가 묻기를 바란다.
그리고 스스로 판단해보기를 바란다.
상황에 대해 의심하고, 감정을 인지하며,
필요하면 나와 다른 결정을 내릴 수 있기를 바란다.
그건 단지 안전의 문제만이 아니다.
아이가 결국 자기 인생을 책임지고 살아갈 수 있는 힘을 갖추게 하는 과정이다.
무례한 클랙슨 소리 앞에서 중심을 지킬 줄 아는 사람,
어떤 말에도 함부로 휘둘리지 않는 사람,
자기 감각과 판단으로 세상을 헤쳐나갈 줄 아는 사람.
그런 아이로, 그런 사람으로 자라나기를 바라는 바람으로
오늘도 아이와 나, 둘 다 조금씩 성장해가는 중이다.
그리고 언젠가 나티가 인생의 큰 길목에서 또 다른 선택의 순간을 마주하게 될 때,
오늘 이 작은 경험들이 그 아이의 판단력과 감정의 방향키가 되어주기를 바란다.
그 순간,
잠깐 멈춰서 주변을 살피고,
자신에게 진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들여다볼 수 있기를.
그 연습은 아주 평범한 하루, 아주 사소한 장면들 속에서 자라난다.
그리고 나는,
그런 일상의 순간들을 아이와 함께 겪고 말로 나누며 살아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