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맥주는 왜 마셔?”

by 허브러빈스



요즘 우리 가족은 함께 외식할 일이 거의 없다.

고등학생인 아들의 학원이 밤 10시가 다 되어서야 끝나기 때문이다.

저녁을 함께할 시간이 줄어들자, 자연스럽게 말 나눌 기회도 줄어들었다.


한때 누군가 '저녁이 있는 삶'을 이야기했을 때,

왜 그런 평범한 일이 화두가 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은 안다.

고등학생 자녀를 둔 가정이라면,

그 평범한 장면조차 결코 당연하지 않다는 걸.


“그거, 다음 주 목요일까지래.”
며칠 전 우연히 얻은 갈빗집 쿠폰의 유효기간이 임박했다.

주말이면 딸아이 학원을 위해

대구를 오가야 하니 시간도 마땅치 않았다.

마침 오늘은 아들의 학원이 평소보다 일찍 끝났다.

다시 말해, 쿠폰을 쓸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다.

‘오늘 저녁 뭐 먹지?’ 고민할 틈도 없이 외식이 순식간에 결정됐다.


늘 망설이던 갈비를 먹기로 한 것도,

별다를 것 없는 하루의 끝을 외식으로 마무리하게 된 것도,

모두 그 작고 얇은 종이 한 장 덕분이었다.

기대 없이 시작된 외출이었지만,

우리는 정말 오랜만에 저녁 식탁에 함께 마주 앉았다.


갈비는 달콤하고 짭짤하며, 육즙이 툭툭 터지는 음식이다.

맛만 따지면 남편과 나도 아이들 못지않게 좋아하지만,

'직접 구워야 한다'는 번거로움까지 고려하면,

그건 분명히 아이들이 더 좋아하는 메뉴다.


부모라면 아이가 좋아하는 음식을 자주 사줘야 하는 게 아닐까 싶다가도,

현실은 생각처럼 그렇게 간단하지 않았다.

기름이 튀고, 연기가 자욱하고, 고기는 쉽게 탄다.

양념이 묻어 있으면 더 잘 타고,

안 타게 하려면 불을 낮춰야 하고,

그러면 고기는 천천히 익는다.

겨우 한 점 익혀보면

어느새 한 아이 입속으로 쏙 들어가 있고,

다른 아이의 텅빈 젓가락이 유독 마음에 걸린다.


그렇게 아이들 챙기며 정신없이 굽고 나면,

정작 부모의 입에는 식은 고기만 남는다.

느긋하고 여유로운 식사를 기대하며 외식을 가지만

현실의 부모는 여전히 아등바등한 채 테이블에 앉아 있다.


그래서 갈빗집 앞에서

“오늘은 그냥 다른 거 먹자”

하고 돌아선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갈비는 그렇게 ‘좋지만 망설여지는 음식’으로 남아 있었다.


프랜차이즈 갈빗집에 들어서자

고기 굽는 소리와 테이블마다 피어오르는 연기가 우릴 반겼다.


“시원한 맥주 하나 주세요!”

평소 술을 잘 마시지 않는 남편이 맥주를 주문한 건,

답답한 공기 탓도 있었겠지만

간만의 외출로 어색한 분위기를 띄우기 위한 선택이었을 것이다.


자리에 앉자마자

중앙의 숯불이 뜨겁게 타오르며 테이블을 감쌌다.

땀이 송골송골 맺힐 정도로 끈적한 열기.

여름이 먼저 테이블 위에 도착한 느낌이었다.


나는 아들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하티야, 이 병 좀 따줄래?”


나는 아이들에게 자잘한 부탁을 자주 한다.

몇 년 뒤 부모를 건사하라고 강요하고 싶어서도,

기대감을 주고받고 싶어서도 아니다.

아이들이 지나치게 편리한 세상에서

자라고 있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우리가 어릴 적 당연히 해봤던 일들—

병따개를 사용하는 일, 전등 하나 갈아보는 일조차—

이제는 경험할 기회 없이 지나쳐 버리기 쉽다.


불편함을 감수하며 배웠던 일들이

이제는 자동화나 서비스,

혹은 ‘누군가 해주는 것’으로 대체된 시대.

그래서 나는 의도적으로라도

그 작은 불편을 아이들 손에 쥐어주고 있다.


세상에 손을 대보는 감각은

말로 알려줄 수 있는 것이 아니니까.


“알겠어.”
아들은 병을 받아들고, 시원하게 “톡” 하고 마개를 열었다.
“고마워.”

사춘기 아들이라 늘 긴장을 늦출 수 없는 요즘,

작은 부탁에 쿨하게 응답해주는 모습이 참 반가웠다.


직원이 차갑게 얼린 맥주잔을 가져다줬고,

아빠의 기대감이 최고조에 달했을 무렵,

아들은 그 잔을 가만히 바라보다 조심스럽게 말했다.
“내가 따라줄까?”
“이야~ 아들이 따라준다니, 당연히 고맙지.”


병을 건네받는 아들의 손끝이 조심스러웠다.
“어른한테 술을 따를 땐, 두 손으로 천천히 기울이는 거야.”
아빠도 두 손으로 잔을 기울이고,

아들도 두 손으로 병을 기울였다.


아아…

언젠가는 아들의 잔에 아빠가 술을 따르게 되는 날도 오겠지.

그렇게 생각하니, 그 낯선 장면이 웃기면서도 찡했다.


아직은 서툰 손짓, 어딘가 어색한 자세.

하지만 그 안에는 자기 몫의 역할을 해보려는

조심스러운 자의식이 담겨 있었다.

좋아하지 않을 수도 있고,

익숙하지도 않으며,

책임이 따를 수도 있는 일을 조심스럽게 시도해보는 그 태도—

그건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 중 하나였다.


사실 ‘술을 따른다’는 행위는

생각보다 조심스러운 면이 있다.

원래는 존경과 사랑을 담은 표현이었을 테고,

친구 사이에는 ‘널 혼자 놔두지 않을게!’라는 메시지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사회에서 경험한 바로는,

술을 따른다는 행위는 복종이고, 위계이며, 서열이었다.

그래서 늘 그 동작에 섬세한 경계심을 품고 있었다.


그런데 그날은 달랐다.

‘진심으로 술을 따르는 모습’을 처음 본 것 같았다.

잔에 채워지는 맥주 거품만큼이나 마음이 몽글몽글해졌다.

아들이 따라주고, 아빠는 조용히 잔을 내민다.

그 안에는 존중이 있었고,

자발성이 있었으며, 무언의 신뢰가 있었다.


“아빠,

어른들은 맥주가 맛있어서 마시는 거야?,

아니면 그냥 습관이야?”
시원하게 한 모금 들이킨 아빠를 바라보던 아들이 물었다.


데자뷰...

전에도 이런 말을 했던 것 같은데,

정작 어떻게 대답했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이 질문은 어떤 의도일까?

아들의 눈을 잠시 흘낏 쳐다보았다.

정말 알고 싶어 하는 눈빛이다.

그건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라,

어른이라는 세계를 이해해보려는 조심스러운 선언 같았다.


남편이 말했다.
“처음엔 그냥 어른이 되고 싶어서였던 것 같아.

몸은 다 컸는데, 스스로 어른이 됐다는 걸 확인하고 싶었던 거지.”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맛있지도 않은 그 술을

왜 여전히 마시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선뜻 답하지 못했다.


그러게…

이미 우리들이 어른이라는 사실은

어느 누가 봐도 자명한데,

왜 아직도 이걸 마시고 있는 걸까?


우리는 아이들에게,

조그마한 일이라도 직접 겪고

그 속에서 자신의 감정을 느껴보라고 가르쳐왔는데...

정작 우리는 이 술 한 잔을 왜 마시는지조차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 순간,

스스로의 감정에 무감각해진 내 모습을 마주해야 했다.

어딘가 부끄러웠다.


나는 늘 아이들에게 말했다.
집단주의를 조심하라고.

그 말은 곧,

자신의 의지와 감정,

도덕성에 늘 깨어 있으라는 뜻이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함께 있던 친구 무리가 누군가를 욕하고 때리려 한다면,

무작정 휩쓸리지 말고 우선 조용히 그 자리에서 멀어지렴.

그리고 부모나 선생님에게 바로 전화를 해.

모두가 함께 화를 낸다고 해서,

그게 꼭 ‘옳은 일’이 되는 건 아니니까.


그런데 정작 나는?

‘다들 그렇게 하니까’라는 안일한 습관 속에서

감각 없이 살아가고 있었던 건 아닐까.

그게 바로,

집단주의의 또 다른 얼굴은 아니었을까.


자라나는 자녀와 대화한다는 것!

그건 단지 자녀의 신변이 궁금해서 라든가,

자녀의 미래를 알고 싶어서,

혹은 좋은 조언이나 제안을 해주고 싶어서만은 아니라는 걸

오늘 다시금 깨닫는다.


우리 아들이 아직 말 못하고 연약한 아기였을 때,

나는 내 관점이 ‘나’에게서 ‘당신’, ‘우리’, ‘이웃’으로

차츰 확장되어 가는 것을 느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것조차도

결국은 나의 관점이었음을 이제야 깨닫는다.


“엄마는 왜 그랬어?”라는 아이의 질문 앞에

답하려 애쓰는 그 과정 속에서

비로소 나의 시선은 ‘너’의 시선이 된다.

아기를 통해 한 번의 자아 성장을 하였다면

사춘기의 자녀를 통해 다시 성찰의 과정이 필요한 순간이 온다.


그렇네...

아이는 어른의 거울이라는게

그건 아이가 사춘기에 접어들어도

여전한 진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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