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신랑은 참 자상하고 좋은 사람이다.
맞벌이지만 자신보다 늦게 퇴근하는 아내를 대신하여 늘 먼저 저녁을 준비하고,
아이들에게 식사를 챙겨주며, 집안 정리며 설거지까지 도맡아 한다.
그런 남편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나는 매일 감사해야 마땅하다.
그런데… 왜 그랬을까.
소위 ‘호강에 겨워 요강에 똥 싸는 소리’라는 말이 꼭 내 얘기였다.
이미 주어진 것들에 감사하기보다는,
아주 사소한 결핍이나 ‘왜 내 마음을 몰라줄까’ 싶은 감정에 스스로 무너져 버렸었다.
특히 1년 만에 재발한 뇌동맥류.
그 불청객이 다시 내 안에 둥지를 튼 뒤로,
마음 깊은 곳에서 웅크리고 있던 공포는 어느새 어둠이 되어 나를 집어삼켰다.
나는 남편이 그걸 알아주길 바랐다.
조금만 부주의해도 쉽게 깨어지는 유리잔처럼,
나를 조심스럽게 다루어주길 바랐다.
하지만 그런 기대가 채워지지 않는다고 느껴질 때면,
나는 못나게도 괜히 화를 내고, 울고, 상처 주는 말을 내뱉었다.
죽음의 사자가 늘 내 옆에 서 있는 것 같은데,
아무렇지 않게 일상을 살아가는 듯한 남편의 모습에 더욱 서러웠다.
내 감정의 폭풍은 결국 가족 모두에게 상처를 주었다.
특히 아이들.
그 작은 눈동자들이
내 분노와 눈물을 고스란히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을,
그때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그렇게 한바탕 질풍노도 같던 시간을 지나고 나서야 어느 순간 깨닫게 된 사실.
사람은 결국 한 번은 죽는다는 것,
그리고 그 순간이 언제가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는 것.
그래서 살아 있는 지금 이 시간을
더 적극적이고 긍정적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
그리고 그렇게 살기 위해선
나 자신뿐 아니라 나의 가족이 함께 행복해야 한다는 것.
그러한 고통과 통찰의 시간을 거치고 나서야
나는 조금씩 감정을 다스릴 줄 아는 사람이 되었다.
조금 더 유연해졌고, 조금 더 단단해졌다.
표정도 한결 부드러워졌고, 미래를 향한 집중도도 높아졌다.
결국 문제라는 건,
그것을 정면으로 똑바로 바라봐야만
비로소 풀 수 있는 것이었다.
요즘 아들을 보면 늘 마음 한구석이 쓰인다.
고등학교 1학년, 한창 피가 들끓을 나이지만,
평일에는 학원에 치여 밤 10시가 넘어서야 집에 들어오고,
주말에는 혼자만의 시간을 원한다.
운동할 시간은커녕, 햇볕 한 줌 쐬기조차 어려운 삶을 살고 있다.
AI시대에 이렇게 사는 것이 맞나 싶다가도
뚜렷한 목적이 아직 없기에
학원 그만둬도 좋다는 용기는 내지 못한다.
그러던 어느 일요일 저녁,
며칠간 지루하게 이어졌던 폭우가 멈추고 드디어 간만의 평온이 찾아왔다.
나는 그 고요함을 가족 모두와 나누고 싶었다.
“우리, 오늘 강변으로 운동하러 갈까?”
갑작스러운 제안에 다들 선뜻 내키지 않는 표정이었지만,
몇 번 웃으며 권하자 결국 한 명, 두 명 몸을 일으켰고,
30분쯤 지나서야 마침내 온 가족이 함께 집을 나섰다.
딸은 허리가 뻐근한 아빠와 빠르게 걷기로 하고,
아들과 나는 강변 한 바퀴, 약 5km를 뛰기로 했다.
사실 나에게 5km는 익숙한 거리다.
지난 4월, 파리에서 마라톤 풀코스를 완주했고,
지금도 매일 1시간씩 댄스를 하며 몸을 단련하고 있으니 그쯤은 부담 없다.
하지만 아들에게는 아니었다.
아들은 태어날 때부터
약시와 평발이라는 신체적 조건을 안고 있었다.
유치원 1년동안은 한쪽 눈을 천으로 가려
시력이 약한 눈을 더 많이 쓰게 했고,
발 아치가 무너져 있는 평발 교정을 위해
늘 깔창을 신발에 넣었다.
중학교 1학년부터는 토끼니처럼
유독 큰 앞니 두 개 때문에 교정을 시작했고,
지금은 그 마무리 단계에 와 있다.
또래보다 자주 넘어지던 아들은 어느 순간부터 달리기를 꺼렸다.
한창 뛰어놀아야 할 유치원 시절,
한쪽 눈을 가린 채 평발을 안고 살아간다는 건
아이에게 얼마나 가혹했을까.
아들이 처음 약시 판정을 받았던 날,
나는 세상이 노래지는 기분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참 바보같은, 과한 반응이었지만 그땐 그랬다.
그래서 공부하기 시작했다.
약시가 무엇인지, 어떻게 치료해야 하는지,
그리고 병원에서 쉽게 권하는 안경이 정말 도움이 되는지를.
평발 때문에 엑스자 다리가 진행되고 있어서
찾았던 대학병원에서 의사가,
'그냥 이렇게 살다가 엑스자가 너무 심해지면
수술로 다리뼈를 돌려놓으면 된다'는 말을 너무 쉽게 하는 것을 보고는
병원 의사의 말에만 의지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안경이 오히려 눈의 자율적인 움직임을 방해한다는 사실을 알고 난 뒤,
나는 아이에게 안경을 씌우지 않기로 했다.
누군가는, 아이의 인생인데 너무 무모한 것 아니냐고 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어차피 의사의 마인드가 그런 식이라면
그 때 가서 뭔가 다른 방법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고,
그 전에는 자연적으로 발달시키는 것을 무시하지 않으리라
나름의 결심을 하였기 때문이다.
물론 그 선택이 아이에게 얼마나 많은 인내를 요구했는지,
지금 생각해도 참 미안한 날들의 연속이었다.
그럼에도 어린아이는 싫다는 말 한마디 없이 묵묵히 따라줬다.
생각할수록 고맙고, 또 고맙다.
그런 아이가 어느새 이렇게 자라,
엄마의 감정까지 품어주는 존재가 되었다니...
그날 뛰었던 5km는 아들에게 있어 생애 첫 장거리 도전이었다.
덩치가 있는 편이라 내심 걱정되었지만,
아들은 아무 말 없이 내 옆에서 묵묵히 발을 맞췄다.
그리고 1.5km쯤 남았을 무렵,
숨소리가 거칠어진 듯해
“좀 걸을까?” 하고 말했더니,
속도를 늦추던 아들이 갑자기 고개를 돌려 말했다.
“엄마, 심장이 느리게 뛸수록 더 오래 산대.”
나는 순간 멈칫했다.
그 말이 정말일까?
병원에 입원할 때마다 간호사들은
“맥박이 정상인보다 많이 느리시네요”라고 걱정스레 말하곤 했다.
내 몸이지만 어떤 원인때문에 이 지경까지 왔는지 전혀 인지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그 말은 자꾸만 내 귓가를 맴돌며 불안의 씨앗이 되곤 했었다.
“그래? 엄마는 그런 말 처음 듣네.”
“그린란드 상어라고 있어. 걔는 10초에 한 번씩 심장이 뛴대.”
“우와, 진짜? 엄~~청 느리게 뛰네.”
“응. 근데 수명이 400년이래.”
나는 아무 생각없이 웃으며 말했다.
“그래? 엄마 예전에 입원했을 때 간호사들이 맥박 느리다고 걱정했었는데...”
그러자 아들은 아주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엄마도 오래 살겠네.”
“그래, 엄마 오래 살겠다 그쟈? 참네... 그 놈의 의사놈들.”
아들의 말이, 세상 어떤 의사의 말보다 더 믿음직스러웠다.
그 한마디가 마치 내 수명을 열 해쯤 늘려주는 것만 같았다.
우리 아들...
엄마한테 걱정하지 말라고,
엄마는 오래 살 거라고 말해주고 싶었던 거였구나.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문득 예전의 내 못난 모습들이 떠올라
참으로 부끄러워졌다.
그리고 마음 깊이 다짐했다.
아들의 말은 내게 ‘오래 살아달라’는 주문처럼 들렸다.
하지만 그것은 단순히 생명을 더 오래 잇는다는 것만이 아닐 것이다.
부모는 아이의 마음속에서 오래 살아야 하는 존재.
가장 따뜻한 기억으로, 단단한 존재감으로 오래 남아야 한다.
아이가 힘들 때 언제든 버팀목이 되어줄 수 있는 존재로.
그래서 나는 오늘도 조금씩 자란다.
아직 성장 중인 어른으로서.
아이의 기억에 오래도록 머물기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