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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협이 중개한다는 대대적인(?) 홍보를 해서 오히려 마음이 놓였다.
그동안 농촌 일거리에서 문제가 많았던 건 강도가 높은 노동이나 적은 임금이 아닌, 우후죽순으로 발생하는 여러 불미스러운 사건때문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외국인 노동자들이야 한국말이 안되고 일부는 (어쩌면 대부분은) 불법 체류자인데다가 단기 체류자이기 때문에 비자 문제때문에라도 농가주에게 제대로 할 말도 하지 못하고 혹사 당했던 거겠지만, 사실 농가 문제에 있어서 한국 사람들조차 자유롭지 않다는 건 농촌 단기 알바를 한 사람들의 후기나 기타 뉴스만 통해서도 바로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오히려 나는, 특히 여자 혼자 농촌에서 일거리를 찾아가겠다는 사람 입장에서는 무엇보다 농협이 중간에서 중개를 한다는 사실이 마음이 놓였다. 설령 그것이 말뿐이고 아직 정책 초기 단계라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다 하더라도 - 내가 직접 1대1로 농가주와 연락해 일을 처리하는 것보다는 안전망이 되어줄 터였다.
귀농귀촌 사이트에 들어갔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우후죽순으로 정리나 연결도 제대로 되지 않았던 농촌 정보 사이트가 리뉴얼됐다는 글은 읽었는데, 정말 깜짝 놀랄 정도로 교육 정보나 일자리 정보, 정책 방향 등 새로운 정보들이 잘 정리되어 있었다. 나라 정책이 하나 만들어지기 시작하면 그 방향성이나 단계가 어떻든간에 어쨌든 투자를 했으니 연말 실적 보고서를 작성해야 하는 공무원들의 필요성때문에라도 어쨌든 귀농귀촌에 관한 정보는 전보다 훨씬 체계적이 되어 있었다.
먼저 농촌 일자리 사이트에 가입을 하고 현재 모집 중인 공고를 보았다. 일자리 대부분이 1~3일 단기였고 한 달정도 필요한 자리도 조율이 가능하다고 써 있었다. 오전 10시반에 경력이 필요없고 나이는 70세까지 가능하다는, 교통편이 괜찮아 보이는 농장 두 곳에 - 감자와 블루베리 - 지원 신청을 넣고 기다렸다.
오후 3시 10분에 감자 농장을 중개하는 농협에서, 그리고 정확히 5분 뒤에 블루베리 농장을 중개하는 농협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간단한 인적 사항과 교통편, 일할 수 있는 날짜를 확인하더니 농가주와 연락할 수 있게 연락처를 넘겨주겠다고 했다. 알았다고 하고 기다렸다. 그로부터 다시 5분 후인 3시 20분에 블루베리 농장주에게 전화가 왔다. 역시 간단한 인적 사항과 날짜 조율, 교통편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나 블루베리 농가주의 이야기는 나를 당혹시켰다.
분명 무경력이라고 되어 있었는데 내가 도착하고 일하는 걸 봐서 일을 맡기겠다고 했다. 그리고 만약 비가 오면 일을 안하니 일당을 줄 수 없다고 했다. 물론 농가주 입장에서는 당연한 주장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농가주라도 일도 전혀 못하는 사람한테 일 맡기고 돈을 줄 수는 없다. 그러나 분명 공지란에는 아무 경력이 필요 없다고 했고, 그 말은 곧 블루베리를 줍거나 따거나 담거나 하는, 기술이 전혀 필요없는 단순 노동이라는 뜻인데 (참고로 브로콜리 농장주 일거리 모집란에는 경력이 필요하다고 분명하게 써 있었다) 알려 준 주소로 교통편을 검색해보니 편도로 최소 6~7시간이 걸리는 거리였다. 교통비도 교통비지만 나 역시 굳이 이 코로나 사태에 돈까지 줘가며 이미 여행을 해 본 지역에 내 돈 내고 갔다가 아무 소득없이 돌아오는 일은 하고 싶지 않았다. 하루 5천원 교통편을 지원해 준다는 농협의 말에 그나마 희망을 걸었지만 그 5천원도 근교에서 출퇴근하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이래저래 나에게는 이득이 없는 장사였다. 블루베리 농협에게 전화를 했지만 오후 6시가 넘어서인지 받지 않았고 문자도 답이 없었다. 나는 다시 블루베리 농가주와 이러저러한 문자를 주고 받은 후 내게 이건 이득이 없는 게 아니라 나에게 손해라는 결론을 내리고 블루베리 농가주와 농협 양쪽에게 정중히 사양의 문자를 보냈다.
연락 온다는 감자 농가주에게서 연락이 없었다.
감자 농협에게 연락을 해 모집 공고가 끝난 거냐, 다른 적임자들이 있는 거냐고 물었다. 만약 감자도 안되면 다른 농촌 공고를 확인하고 지원하면 되니까 부담은 없었다. 감자 농협 측은 지금 양파밭이라며 목소리에서도 바쁜 기색이 역력했다. 몇 시 후에 연락을 주겠다고 했고 약속을 지켰다. 바로 다음 날부터 3일간 일하기로 약속하고 첫 차를 타고 간다는 것을 알렸다. 알려준 농가주에게는 문자로 농협에서 연락받은 000다, 내일 몇 시차로 출발해서 몇 시에 도착한다, 잘 부탁한다라는 문자를 보냈다. 조금 후에 농가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도시 아가씨"가 일을 잘 할 수 있겠냐는 시원시원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신도 원래 이 지역에서 사는 사람은 아닌데 감자만 수확하는 거라고 했다. 내일 보자는 우렁찬 목소리에 나도 간단하게 네 내일 뵙겠습니다, 하고 전화를 끊었다.
코로나 여파로 고속버스는 현재 단축 운행 중이다. 첫 차는 6시 40분이고 저걸 놓치면 8시 차를 타야 한다. 알람을 오전 5시에 맞추고 잠을 청했다. 잠이 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