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일(iii)
결국 경찰이 왔다.
오후 5시 반쯤 온 것 같다. 이 시간을 기억하는 이유는 5시가 돼서 학생들은 돌아갔고, 커플은 핸드폰 보상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고, 가만히 옆에 서 있는 우리(나, 어제 나처럼 농협 중개로 온 남자, 여기 현지 어머님)를 보더니 농가주가 어제 내가 8시 반에 왔는데 5시에 끝냈으니 오늘은 어제 못한 1시간을 더해 6시까지 해야 된다며 우리 세 명을 다시 밭으로 가서 일을 하라고 했기 때문이다.
정확하게 들리지 않는 고성방가 속에서 분명한 외침을 들은 건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그럼 이걸 저 여자분에게 물어내라는 거예요?!???!!"
“저 여자분”이라면 여기서 나밖에 없잖아. 하아.
뭐 이런 것도 어느 정도 예상은 했다만. 박스 옆에 있던 가방인데 내가 박스 테이핑을 했으니 내가 핸드폰을 부쉈다는 얘기 구만. 그런데 내가 기억하는 그 여자의 하늘색 가방은 아까 저 위에 적었듯이 감자를 옮기기 전에 이러저러 짐이 가득했던 트럭 위 박스 중 하나에 놓여있는 장면밖에 없다. 그 뒤로 본 적이 없었다. 만진 적은 당연히 없다. 밟은 적은 더더욱 없다. 게다가 사람이 밟아서는 핸드폰이 저렇게 되지 않는다. 어차피 경찰도 와 있겠다, 나는 결백하겠다, 당당하고 아쉬울 게 없었다. 가서 내 이야기를 해야겠네.
같이 감자를 줍고 있던, 역시 나처럼 어제 농협 중개로 일을 시작한 남자가 이러저러 이러저러 보험 이름을 대면서 그게 있으면 바로 해결되는데 왜 경찰까지 왔는지, 경찰 와도 해결 안 된다는 이야기를 했다. 알고 보니 이 남자는 오랜 시간 보험 쪽에 일을 했어서 이런 쪽에 지식과 경험이 풍부했다. 안 그래도 묵묵히 일하면서 어제부터 농가주가 말하는 각종 이야기들에 나처럼 조용히 들으면서 웃음으로 대꾸하는 이 남자에게 좋은 인상을 가지고 있었는데, 시간 약속도 잘 지키는 데다가 흥분하지 않고 실질적으로 해결책까지 제시하는 모습을 보니 신뢰도가 상승했다. 내가 농가주가 그런 보험을 아는 것 같지 않다, 가서 이야기를 해주면 어떻겠냐고 했다. 남자는 농가주 부인이 농협에서 일한다고 하지 않았냐, 그러면 이런 기초 보험을 모를 수가 없다라고 말했다. 나는 속으로 그 농협이 그 농협이 아니라 농협 마트인 것 같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남자는 허리를 피더니 ‘에이 우리가 호구야 뭐야 우리 왜 자꾸 일하는 거야’하면서 (우리 모두 웃었다) 감자밭 도로 왼쪽에 있는 농가주의 소형차에 주목했다. ‘오 저기 블랙박스 있겠네. 저걸 보면 트럭이 가방을 밟았는지 아닌지 알 수 있겠네’라고 말했다. 오. 역시. 역시 똑똑해. 그리고 차분하고 현명해. 농가주의 소형차는 트럭과 같은 방향에 있었다. 블랙박스 확인이 가능하다. 반면 남자의 차와 커플의 차는 도로 오른쪽 끝 언덕에 있어서 블랙박스로 확인하고 싶어도 각도가 안돼서 확인할 수가 없다. 오케이. 내 무죄도 증명하고 저 사람들도 핸드폰 보상을 받을 수 있겠네.
나는 고성방가가 오가는 현장으로 올라갔다.
경찰 두 명은 이제 농가주를 붙잡고 이야기하고 있었다. 블랙박스 이야기가 당연히 나오겠지? 나는 커플에게 몸을 돌려 내가 일하고 있던 상황을 설명했다. 내 이야기를 듣는 두 사람의 모습에서 이 두 사람은 처음부터 나를 의심하지 않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하긴, 오늘 하루 종일 서로 어떻게 일을 했는지 다 보고 있었다. 박스 테이핑 노선이 어찌 되는지도 서로 다 알고 있다. 여자가 타이어 자국이 선명한 가방을 내게 보이며 말했다. “이게 자꾸 사람 신발 자국이라잖아요.” 헛웃음이 나왔다.
경찰은 생각보다 오래 있었다.
커플은 물러서지 않았다.
그래, 저렇게 고래고래 소리 지르는 농가주에게 움츠리는 나이는 이제 막 고3, 10대를 겨우 벗어난 20살, 21살들 뿐이다. 게다가 서로 이름도, 왜 여기 왔는지도 이야기한 적은 없지만 (내가 위에 명시한 나이와 직업에 관한 개인 정보는 모두 당사자가 아닌, 농가주가 말해서 알게 된 사실들이다) 서울에서 여기까지 와서 일을 하는 이유는 모두 그만큼 그 이상의 무언가를 고민하고 생각한 결과물임은 분명했다. 단순 돈이라면 오지 않았다. 요즘은 최저시급이 높기 때문에 굳이 1시간 1,000원 차이로 이런 노동을 하지 않는다. 기름값과 숙박비와 약값이 더 나온다. 그런 우리를 농가주는 외국인 노동자와 비교하며 너무 가볍고 안일하게 생각했다. 돈 안 준다고 소리 지르고 욕하면 벌벌 떠는 건 20살들 뿐이다.
나이가 들어서 좋은 부분은 분명히 존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