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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인 Apr 29. 2023

포기한 끝의 삶

책 <네 얼굴로 울 수 없어> 추천

15살에 몸이 뒤바꾼 남녀가 15년이 지나 30살이 되어도 여전히 뒤바꾼 몸으로 살아가며 (연인이 아닌) 인생의 진정한 동반자가 되는 이야기, 기미지마 가나타의 <네 얼굴로 울 수 없어>를 읽었다. 강력 추천.


작가가 인터뷰에서도 밝혔듯이 이 작품은, 뒤바꾼 몸을 통해 남녀의 사랑을 이야기하는 여타 작품들과 달리 알 수 없는 이유로 몸이 뒤바뀐 두 사람이 이를 계기로 자신과 타인을 더 잘 알고 이해하게 되는, 성장하는 삶을 다루고 있다.

나아가 작가는 갑자기 몸이 뒤바뀌는 '사고'를 겪는 두 주인공처럼 우리가 살면서 이해할 수 없고 바꿀 수도 없는 어떠한 상황이 발생했을 때 - 이를 받아들이고 살아가는 매일매일을 여자의 몸으로 살게 된 남자 주인공의 1인칭 시점으로 공유하며 이러한 현실을 인지하고 수용하고 받아들이고 난 후 - 그러니까 "포기한 끝의 삶"을 살아가는 성숙한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어서 영화로도 나왔으면 좋겠다.




추신:

이 소설을 강력 추천하는 이유는 지금까지 내가 읽었던 수많은 '여자 시점으로 글을 쓰는 남자 작가들의 오류'가 단 한번도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심지어 하루키조차도 <1Q84>를 포함해 때때로 전지적 시점으로 묘사하는 여자 주인공의 심리가 - 특히 여자들의 월경 부분 - 여타 남자 작가들의 클리셰를 벗어나지 않는구나 하고 실망했었는데 이 작품은 그런 부분이 전혀 없다. 그래서 처음에는 작가가 여자인 줄 알았는데 나중에 보니 남자여서 인터뷰 기사도 구글 번역기 찾아서 읽어봤다.


https://shosetsu-maru.com/interviews/authors/storybox_interview/101



기분 좋게 새벽부터 비 오는 오늘 날씨에 조용히 읽기 좋은 책이다. 추천.






* 예전 모습 그대로 변함없단 느낌을 주지 못하면 지는 것이란 마음과, 상대의 노력에 걸맞은 모습이어야 한다는 마음이 공존한다.

* 마음을 도려내는 듯한 일상도 당시엔 못 견디게 괴로웠는데, 어느덧 그땐 힘들었지, 하며 함께 웃을 수 있게 됐다.

* 미주무라 마나미란 여자는 그런 사람이다. 강하고, 치사한 사람이다.

* 말할 것도 없이 마음속에 그렸던 것과는 딴판이었고, 생기 없고 메마른 일상을 보내며 청춘을 낭비해 버렸다.

* 다음번에 만나는 건 언제가 될지 모른다.(...) 내가 나로 있을 수 없다는 게 이토록 고독한 일인 줄은 몰랐다. 더 이상, 그 누구도 진짜 나를 모르는 채 혼자 있기는 싫었다.

* 엄마가 아빠의 구두를 왼발로 짓밟으며 문을 열었다.

* 그렇지만 역시나 만날 수는 없다. 나는 분명 기대하고 말 것이다. (...) 그리고 또다시 만신창이가 될 뿐이다. 기대하지 않으면 배반당하지 않는다. 원하고 또 바라도 무엇 하나 보답받지 못한다면, 애초부터 기대하지 않으면 된다.

* 이곳에 돌아오고 싶지 않다는 마음과 돌아오고 싶다는 마음이 맞부딪쳐, 진심은 어쩌길 바라는 건지 스스로도 잘 모르겠다. 보고 싶은 사람은 많다. 보고 싶지 않은 사람도 비슷한 정도로 많다. 하지만 결국 이렇게 돌아오고야 말았다. 결국은 그 정도 수준의 치졸한 각오였단 뜻이다.

* 예전엔 나도 가지고 있던 것들인데. 남자의 성기며 성욕이며 연심(戀心). 일찍이 가져봤던 것들이라 그런지도 모르겠다. 아무리 해도 거부감이 들고야 마는 건.

* 나보다 훨씬 길쭉한 두 손과 두 다리로 내 몸 위에 올라타 있다. 팔다리라는 우리에 날 가둬두려는 느낌이었다. 그 정복욕이 어쩐지 편안했다. 모든 걸 맡길 수 있을 듯했다.

* 그토록 간절히 지켜오려던 걸 허무하게 잃고 말았다. 하지만 후회되진 않았다. 해냈다는 마음마저 있었다.

* 궤변이다. 자기 합리화나 다름없는 변명이다. 마음속으론 납득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구원받은 기분이 든다.


결국 나는, 구원받기 위해 미즈무라를 만나고 싶었을 뿐이다. 그 어떤 자기혐오나 양심의 가책에 짓눌리려는 순간에도, 미즈무라는 늘 내가 원하는 말을 해주고 내가 바라는 일을 해준다. 절대로 부정하지도, 언성을 높이지도 않고. 그 달콤한 약물 같은 말이 없으면 나는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그 사실이 조금 무섭기도 하다. 미즈무라의 진심은 아예 다른 쪽을 향해 있을지도 모르므로.

* 단호히 잘라 말하기에 말문이 막힌다. 차가운 칼날을 들이밀자 그렇담 나도, 하는 생각으로 더욱 강력한 말의 무기를 찾는다. 받은 상처보다 더 큰 상처를 입히고 싶어 진다. 점점 돌이킬 수 없는 곳으로 가버리고 있단 걸 마음 한구석으론 알고 있으면서도.

* 아무튼, 난 언제든 널 도울 거야. 언제까지 네가 너 자신의 편일 수 있도록.

* 분명 우리라면, 어떻게든 헤쳐나갈 수 있을 것만 같다.

* 누구에게도 말 못 할 비밀을 공유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건 의외로 나쁘지 않은 일이다. 아무도 몰라도 괜찮다. 둘이서만 알고 있으면 된다. 아무도 본 적 없는 둘만의 기적으로 수없이 괴로워하면서도, 그러면서도 서로를 구원해 주고 서로의 이야길 주고받을 수 있다면 그걸로 됐다. 그리고, 비밀도 나쁜 짓도 둘이서 반으로 쪼개 남몰래 살아가자. 아마도 그건, 혼자인 것보다는 훨씬 즐거울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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