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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인 May 23. 2023

사전을 만드는 37년의 시간 ①

책 <배를 엮다>


굉장히 신선한 책이다. 강력 추천. 일본 서점대상 2012년 1위를 한 작품인데 여타 수상작들과는 다른 소재와 결, 특이한 전개 방식으로 사전이라는 책이 만들어지는 과정과 우리네 인생에 대한 여러 생각거리를 안겨준다. 추천한다. 찾아보니 2014년에 <행복한 사전>이라는 이름으로 영화로도 개봉했던데 나중에 꼭 보고 감상평을 남기고 싶을 정도로 원작이 마음에 든다.




<배를 엮다>는 한 출판사 사전 편집부에서 37년간 <대도해'바다를 건너는 배'>라는 이름의 사전을 만드는 여정을 다루는 소설이다. 책은 편집부 직원들의 시점을 옮겨 다니며 사전이라는 책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완성되는지를 보여준다.



연애나 치정, 살인, 폭력, 마법이나 타임머신 등이 등장하지 않는 오직 '사전 제작 과정'이라는 다소 심심해 보이는 소재때문에 책을 읽으면서 뚜렷한 기승전결보다는 기기기기기결 혹은 기기기기기기기기전결같은 단조로움이 걱정될 수도 있는데, 막상 읽다보면 잔잔하다고 느껴지는 이야기 흐름이 오히려 여타 스릴러나 미스터리 작품 못지 않게 처음부터 끝까지 독자의 집중력 멱살을 끌고가는 신기한 경험을 할 수 있다. 그래서 더 추천. 아울러 평소 책 제작이나 책 역사에 관심이 많고 사전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에 대한 일말의 궁금증이라도 있던 독자라면 아주 만족할 것이다.



개인적으로 사전을 만드는 과정이 아무리 작가가 사전 조사를 했다고 하더라도 지나치게(?) 현실적이라는 느낌이 들어서 따로 검색을 해봤는데, 아니나 다를까 <배를 엮다>의 작가 미우라 시온은 대학을 졸업하고 출판사에서 너무나도 일하고 싶어서 무려 20개가 넘는 출판사에서 면접을 보고 떨어진 경력이 있는 사람이었다.



작가가 된 계기도 희한하게 어렸을 때부터 작가가 되고 싶어서 꾸준히 글을 쓰고 어디 공모전에 당선되거나 인터넷에 글을 게재해서 발탁된 게 아닌, 면접 보던 출판사 직원 중 하나가 '당신은 출판사 직원이 되기 보다는 글을 잘 쓰니 작가가 되는 게 더 어울린다'라는 이야기를 듣고 꿈과 목표가 변경되어 그 날로 글을 쓰기 시작해 작가가 된 사람이라고 한다. 사실 왜 20개가 넘는 출판사들이 모두 이 사람을 면접에서 떨어뜨렸는지 신기하다. 미우라 시온은 무려 일본 명문대 중 하나인 와세다대 문학부 출신이던데. 이런 게 작가가 될 팔자라는 건가?



소설은 은퇴를 앞둔 출판사 사전 편집부 직원 아라키의 새 직원 물색으로 시작해 이후 37년간 한 권의 사전 - '바다를 건너는 배'라는 뜻의 <대도해>라는 이름의 사전 - 이 만들어지는 제작 과정을 보여준다.



전개가 특이하다. 시간 흐름과 사건 시점이 예상치 못한 순간에 파파팍 넘어간다. 가령 책 첫 장에서는 책을 좋아하는 아라키라는 어린 남학생이 대학을 가냐마냐로 시작되다가 갑자기 5페이지만에 은퇴를 몇 달 앞둔 아라키가 되어 지난 30여 년간 한 출판사에서 사전만 만들며 살았다는 이야기를 사전 편찬 고문과 나누다가 이제 앞으로 누가 자신을 이어 새롭게 사전 편집부에서 이 대형 프로젝트를 맡겨야 하나,라는 대화로 넘어간다. 그리고 바로 이어 현재 같은 출판사 영업부에서 일하고 있는 27살 대학원 졸업생 마지메라는 청년에게 이야기 초점이 맞춰진다. 시간 점프가 예상치 못한 시점에서 그냥 자연스럽게 넘어간다.



소설은 영업부에서 "지나치게 성실"함을 더한 몇 가지 성격 덕분(!)에 영업부에서는 빛을 발하지 못하지만 사전 편집부에서는 그런 성격이 더할나위 없이 맞아 같은 편집부 직원들과 합을 맞추며 일하는 과정을 실제 사전이 만들어지는 과정과 더불어 함께 보여준다. 여기에는 각 직원들의 개인적인 삶도 조금씩 비추어지는데 그 부분이 이야기의 메인 주제인 '사전 제작'에 어긋나지 않는다. 하나의 큰 사명 아래 직원 한 명 한 명의 하루 일과가 보여지는데 그 안에서 직원들 사이와 외부 고문들, 사전이 만들어지는 과정들이 얽키섥키 하나의 큰 덩어리가 되어 함께 움직인다.



그렇게 '바다를 건너는 배'라는 뜻의 <대도해>라는 사전을 만드는 과정에서 시간은 계속 흐르고, 이때 또다시 그동안 27살 그리고 어느 덧 29살이 된 마지메와 직장 동료들간의 삶 속에서 갑자기 또 뜬금없는 (그러나 자연스러운) 13년 타임 점프를 한다.



이야기 시점은 이제 이 출판사에 입사한지 올해로 만 3년이 된 여직원 기지메로 넘어간다. 기지메는 모두 가기 싫어하는 사전 편집부에 발령되어 툴툴거리며 사전 편집부에서의 첫날을 시작하는데 - 이제 13년이 흘렀고 여전히 <대도해> 집필 중이고 현재 5교정을 거쳤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그리고 그 13년 사이사이에 다른 사전들 (심지어 만화 게임 사전!!!!)을 만드느라 <대도해>가 시간이 오래 걸렸던 이유를 듣게 된다. 현재 자료 조사와 단어 선정 편집 과정은 모두 마쳤고 지금은 사전 인쇄 종이 선정으로 바쁘다. 이 종이 선정 역시 현재 계속 관계자와 피드백을 주고 받으며 개정을 반복하고 있다. 그렇게 기지메가 들어 온 후 그로부터 또 1년8개월 지나고 드디어 마침내 <대도해> 사전의 인쇄 종이가 결정된다.



끝으로 이렇게 해서 27살 마지메가 사전 편집부에 들어와 아라키의 작업을 이어 받아 15년이 걸려 드디어 <대도해>가 완성된다. 아라키가 일했던 시간까지 합치면 한 권의 사전이 만들어지는데 무려 37년이 소요된 셈이다. 그 시간 동안 누구는 은퇴를 했고, 누구는 연애와 결혼을, 누구는 입사를 했고 또 누군가는 죽었다. <대도해>가 완성된 날 마지메는 이제 고문인 아라키에게 이런 말을 듣는다. "자, 마지메군, 내일부터 바로 <대도해> 개정 작업 시작하자고". 사전 편찬에 끝은 없다. 희망을 싣고 넓은 바다를 가는 배의 항로에 끝은 없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전개가 특이한 게, 37년간 사전 한 권을 만드는 과정을 출판사 편집부 소속 직원들의 시점으로 옮겨가며 그리고 있다. 따라서 읽다보면 대체 여기서 기승전결이 뭐지?라는 생각을 안할 수가 없다. 굳이 이 소설에서 기승전결의 '전', 그러니까 '위기'를 골라보자면 - 소설 마지막 20페이지 쯤에서 드디어 37년만에 나오는 사전이 2개월 전 갑자기 누락 단어가 발견되어 한 달 넘게 50여 명이 넘는 아르바이트생을 포함하여 사전 편집부의 모든 직원들이 밤을 새며 기타 누락이나 실수, 오타를 찾아다녔다는 것 정도?



그러나 지루하지 않다. 오히려 신선하고 편안하고 재미있고 좋다.

무언가 하나를 묵묵히, 꾸준히 하는 사람들의 성실함이 주는 힘, 신념, 믿음이 느껴진다고나 할까.

우리 인생도, 삶의 의미도 결국 이런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 책을 덮고 나면 묘한 감동이 스며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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