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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인 May 26. 2023

어느 날 장님이 되었어도 판사가 된 사람

책 <뭐든 해 봐요>

두 번째 읽는 에세이다. 개인적으로 추천하는 에세이들이 몇 있는데 그중 하나다. (다른 에세이들은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 <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 <철학자와 늑대>, <나쁜 페미니스트>, <와일드: 4285km 이것은 누구나의 삶이자 희망의 기록이다>,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호모러너스, 나는 달릴수록 살아난다>, <본투런>, <딸에게 주는 레시피>)



저자는 현직 판사 김동현. "과학고, 카이스트 졸업 후 IT 전문 변호사가 되고 싶어 연대 로스쿨 재학 중 2012년 5월 간단한 시술 도중 발생한 의료 사고로 시력을 잃었다. 이후 다시 복학, 우수하게(!) 로스쿨을 졸업하고 변호사 시험도 합격, 2020년 10월 신임 법관으로 임명되어 현재 판사로 재직" 중이라고 한다. 유퀴즈에도 나왔었고 지금도 가끔 일부러 찾아보는 영상 중 하나다. 




이 책을 추천하는 이유는 우리에게 불합리하고도 예상치 못한 불행(저자의 경우 의료 사고로 인한 시력 상실)이 닥쳤을 때 헤쳐나가는 방법과 힘을 심어 주는 동시에 현재 우리나라 시각장애인을 포함하여 장애인 전반의 사회적 현실과 문제점들을 다방면으로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자판기에 음료수 점자가 표시되어 있지 않아 처음에는 물만 골랐다는 소소한 이야기부터 시작해 학계, 법조계, 의료계에서 일어나는 각종 논의와 발전들(예를 들어 시각장애인들을 위한 책이나 문제집 제작 과정들, 국립장애인도서관에서 받을 수 있는 도움, 시각장애인을 위한 각종 프로그램 등), 그리고 또 그와는 반대되는 사건 사고들을(장애인이 장애인인권센터에 민원을 넣으며 화를 내는 일들, 장애인이라는 걸 이용하여 돈을 대출하고 신용을 이용하는 일들 등)  저자를 통해 알 수 있다. 읽다 보면 나름(?) 잘 안다고 생각했던 분야가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는 걸 알게 된다. 여러 가지로 생각이 많아진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가장 좋았던 부분은 바로 저자의 태도였다. 



알 수 없는 일이 일어났을 때, 특히 저자처럼 아무리 생각하고 곱씹어봐도 내 잘못은 조금도 없는 어떤 불가해한 인과 결로 나를 덮쳤을 때 저자가 이에 대한 분노와 슬픔, 수용과 다시 일어서는 태도와 마음이 정말 좋았다. 나는 개인적으로 낙천적이라는 말은 비현실적인 헬렐레 사람이라 느껴져서 좋아하지 않고 긍정적이다,라는 단어를 좋아하는데, 이 단어에 딱 어울리는 인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현실적이면서도 성실하고, 자기 자신을 잘 알면서 동시에 고마움을 잊지 않는 강하고 단단한, 따뜻한 사람. 특히 이 책을 두 번째 읽으면서 한 번 더 느꼈던 점은 바로 저자가 이 모든 일이 자기 혼자만의 힘으로 가능했던 게 아니라는 사실을 - 사회의, 기술 발전의, 가족의, 친구의 도움이 있었다는 사실을 - 끊임없이 인지하고 고마워하고 있다는 점이 좋았다. 부족한 부분을 갱신하고 나아가는 과정에서 판사로서의 자신의 능력을 사용하는 결심과 행동도 멋졌고.


https://www.youtube.com/watch?v=ZT9NsPB8UJU


저자가 이야기하는 많은 시각장애인 관련 일화 중에 책 제작 부분만 옮겨 적어 보자면 (왜냐하면 나는 책 제작에 관심이 상대적으로 더 많아서) 다음과 같다.



* 읽을 수 있다고 해도 점자책은 부피가 너무 크고, 원하는 부분을 찾기도 어렵다. 


* 국립장애인 도서관에서도 장애인들을 위한 대체자료 제작 서비스를 제공한다. 책을 신청하면 '데이지'라는 파일 형태로 책을 제작해 국립장애인 도서관 홈페이지에서 들을 수 있다. 특별히 비용이 들지는 않지만 한 번에 제작할 수 있는 책 수도 제한이 있고, 제작하는 데 무척이나 오래 걸린다. 2~3개월 걸리는 것은 보통이고 민사집행법 교과서는 5개월이나 걸렸다. 5월에 수강 신청을 하고 제작 신청을 했는데 중간고사 직전인 10월에야 책이 나왔다. 책을 받아 보고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각주가 너무 많았다. 수백 개나 되는 각주를 본문에 다 넣다 보니 읽을 때마다 본문인지 각주인지 알 수도 없었다. (...) 표 부분도 그렇다. 


* 장애학생지원센터로부터도 지원을 받았다. 전문적인 장비가 없어도 도우미 학생들이 일일이 책을 타이핑을 해서 많이 맡길 수도 없고 미안하기도 해서 한 학기에 한두 권 정도 부탁했다. 


* 내가 책을 사서 실로암복지관에 보내면 책을 잘라 스캔하고 OCR(광학 문자 인식) 프로그램을 돌려 텍스트 파일을 보내 준다. 그런 뒤에 교정 선생님이 책과 파일을 비교해 가며 일일이 교정을 본다. 한 페이지에 천 원.





나라면 어땠을까. 잘 모르겠다.



내가 저자와 같은 친구와 가족이 있다면 저자와 같을 수 있을까, 혹은 저자와 같은 지도 교수와 지인들을 만났다면 그럴 수 있을까 계속 생각해 봤는데, 모르겠다 진짜. 모르겠다.



나에게 매일 3천 배, 한 달간 함께 9만 배 절을 같이 올릴 수 있는 어머니가 있는가? 30년 만에 다시 담배를 시작하고 술을 많이 마시기 시작하는 아버지와 아파서 수술까지 받은 동생이 있지만 동시에 나에게 그 어떤 부정적인 말도 하지 않는, 나를 지지하는 가족이 있는가? 함께 밥을 먹는 것뿐만 아니라 수업과 시험 필기 공부를 도와주고 앞이 안 보이는 나를 위해 각종 시스템, 인맥을 알려주는 동시에 예전과 같이 늘 내 곁에 든든하게 함께 있는 친구들과 지도 교수, 지인들이 있는가? 새로운 세상을 함께 해 줄, 그리고 이미 중도 시력 상실이라는 세상을 경험해 본, 길라잡이가 되어 줄 선배들과 동료들이 나에게 있는가? 



무엇보다 이 모든 일이 일어났을 때 나는 나 자신을 욕하지 않고 여전히 응원하고 지지하고 귀하게 여길 자신이 있는가? 타인을 용서하고 이 상황을 수용할 자신이 있는가? 하루종일 침대에서 나오지 않고 먹는 걸 거부하거나 혹은 지나치게 많이 먹음으로써 어서 빨리 죽기만을 바라지 않을 자신이 있는가? 스스로 이미 망했다고, 나는 역시 쓸모없는 인간이야 아무도 나를 좋아하지 않아 나도 나를 좋아하지 않아 -라고 믿지 않을 자신이 있는가? 하루하루 성실하게, 열심히, 묵묵히, 즐겁고 재미나게 살 자신이 있는가? 감사한 마음을 잊지 않을 자신이 있는가?



모르겠다.

모르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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