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1일1생각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지인 Jun 03. 2023

115. 공허감

커피 끊은 지 4일 차

십수 년 동안 사약 사발을 들이켜는 것 같다는 커피를 끊은 지 오늘로 4일이 되었다. 여전히 자꾸 졸리고, 몽롱하고, 눈알이 쑤시고, 뇌에 안개가 낀 듯하다. 그런데 커피를 끊는 게 드디어 감정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게 느껴졌다. 어젯밤부터 오늘 내내 이게 뭐지, 이 기분은? 했는데 오늘 아침 즐겁고 재미난 러닝 대회를 갔다 오고도 계속되길래 어어 이게 뭐야, 하고 들여다보니 아이고야, 공허감이었다.



아주 오래전 커피를 한 달간 끊었을 때도 급격히 감정이 처질 때가 있었는데 이번에는 그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역시 영향이 없지는 않은 모양이다. 하긴, 십 수년간 매일 계속하던 걸 갑자기 안 하겠다고 하는 건데 몸과 정신에 반응이 없다는 게 오히려 더 이상하지.



그래도 어쨌든 4일째인 오늘까지 커피를 한 모금도 입에 담지 않았다. 눈은 여전히 벅벅 뻑뻑하고, 뇌는 약간 졸리고, 몸은 어딘가 구부러진 듯 게운치 않다. 그런데 이런 감정적 무드는 매우 정상적이고 흔한 커피 중독 현상이라고 하니 기다리고 있다. 묵묵히 지나가 주기를. 앞으로 짧으면 하루, 길으면 일주일만 더 견디면 된다. 그럼 끝난다.



아울러 왜 이렇게 커피를 끊으려고 하나.


과거를 엎어버리고 싶어서.

과거를 엎어버리고 싶어서다.



내가 과거의 나와 다르다는 걸 스스로에게 증명할 게 뭐가 있나 생각해 봤다. 예전에는 번호를 바꾸고 누군가를 차단하고 손절하고 있던 곳을 떠나거나 상대방이 떠나가게 만들었었다. 그런데 그건 길게 보면 그다지 좋은 일이 아니었다(물론 필수불가결할 때도 있었다). 비겁했고, 회피 성향만 높여주느라 나 자신에게 그다지 영양가가 없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내가 생각하는 내 안의 나쁜 점 중 고칠 게 뭐가 있나 생각해 봤더니 - 아무래도 커피인 것 같아서. 내가 과거를 엎어버리는 방식은 이런 거다,라고 스스로에게 보여주고 싶어서.








 


 

매거진의 이전글 114. 부모님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