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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인 Jun 15. 2023

127. 무신론

커피 끊은지 16일차.

1.

"참호 안에는 무신론자가 없다"고 한다. 그러니까 목숨이 위태롭다고 느껴질 때 어딘가에 진정 의존하지 않는 사람은 없는 것이다. 이런 걸 생각해보면 사람은 애초 간사하다고 해야할지 아니면 원래 인간은 다 그래 라고 해야할지 잘 모르겠다. 아. 그냥 원래 인간은 다 그래, 라고 해야 겠다. 그게 내 마음이 편하다.



2.

오늘은 아침부터 사람들 연락 폭포로 정신이 없었다.


첫 타자는 무려 새벽 5시반에 아무리 봐도 오해로 인한 '나 지금 기분 나쁘고 자존심 상했고 이건 다 너 때문이야'식 카톡이 와 있었는데, 일단 아침 6시 러닝을 나가야 했기에 심호흡을 하고 답은 러닝 후에 하기로 결정했다. 요즘 다시 아침 러닝을 시작했는데 5키로밖에 뛰지 않는데도 다시 습관화하려니 조금 힘이 부쳐서. 갔다와서 샤워를 하고 해당 카톡에 답을 했다.


뭐랄까, 계속해서 알 수 없는 미묘한 신경전과 질문들이 왔는데, 그 끝에는 '내 기억에는 이거 네가 제안한건데 왜 내가 제안하는 거로 되냐'는 다소 황당한 말이었다. 나는 우리가 같이 생각한 걸로 기억하는데 '나는 원래 이런 걸 먼저 안한다'는 말까지 하면서 내 기억력을 걸고 넘어지는 걸 보고, 아, 무언가 큰 오해가 있구나 라는 건 알 수 있었다. 그런데 그 오해가 뭔지 아침 7시반에는 잘 파악되지 않았다.


게다가 이건 일이 아니기 때문에 이 경우 어디까지 상대방을 설득하고 이해하고 이해시켜야 하는지 고민이 되기도 했고. 일단 왜 기분이 더러운지 그 이유를 모르고 상대방도 이해할 수 없는 날카로운 말들을 아침부터 하는 걸 보고 아, 뭔지 모르겠지만 일단 화가 난 상황을 잠재워야 된다는 건 알았기에 내가 말할 수 있는 팩트를 최대한 설명했다. 상대방은 고맙다는 내 말에 조금 마음이 누그러진 것 같았다.


그렇게 아침 인사를 마치고 다시 방금 전에 한 카톡 대화를 다시 읽어봤다. 순간 계속해서 반복되는 질문들이 있다는 걸 알았다. 그리고 계속해서 되풀이하는 자기 주장도. 어디서 오해가 있었는지 파악이 되었고 이 부분은 이미 언급한 적이 있었는데 상대방 또한 기억을 못한다는 걸 깨달았다. 게다가 난 이게 그렇게 큰 문제가 될지 몰랐는데 아, 이런 일로 기분이 나쁠 수도 있구나, 그럼 더더욱 설명을 잘 해야겠다 하고 카톡을 마친지 20분이 지나 다시 오해가 있는 것 같다, 라며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그런 나를 보고 눈치가 빠르다고 했지만 눈치가 빠르다고 할 수는 없는게 - 새벽 5시반에 그런 질문들을 기분 좋을 때 하는 사람은 없지 않을까.


하지만 어디서 오해가 생겼는지 이제는 알겠고, 왜 "먼저" 제안한 게 기분이 나쁜지도 내가 들었던 이야기를 토대로 충분히 자존심 상했을 거라는 것도 이해가 되었다. 아마 이 세계에서는 이런 제안들이 자존심의 문제인가 보다. 나는 전혀 몰랐지만. 다행히 잘 마무리 되었고, 기분 좋게 끝났다. 다행이다.



3.

그 다음에는 핀란드에 있는 친구에게 전화가 왔다. 앞으로 매주 1~2회씩 시간을 정하고 서로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그 결과와 과정을 공유하자고. 굉장히 기쁘고 재밌고 신나기는 하는데 사실 6시간 시간차 때문에 대화가 즐겁기는 하지만 동시에 그 시간을 맞추기 위해 생각할 거리가 많았다. 한 시간 회의를 했다. 그런데 그 한 시간이 너무 좋기도 하지만 동시에 너무 힘들었다. (나는 통화를 좋아하지 않는다. 물론 이 상황은 통화를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지만.)



4.

그 다음에는 러시아에 사는 친구에게 연락이 왔다. 여권관련 일인 것 같은 음성 메세지들이 왔는데 솔직히 들을 엄두가 안났다. 무슨 말을 했을지 반은 짐작이 가는데 만약 보낸 음성에 반응을 하면 질문 폭포수가 쏟아질 것 같아서 미연에 방지. 내일 연락해야지.



5.

그 다음에는 약속을 연이어 취소해야 했다. 어제도 일이 있어서 결국 약속을 취소할 수 밖에 없었는데 내일도 일이 있어서 약속을 또 취소할 수 밖에 없었다. 약속을 취소할 때면 괜시리 죄인이 된 기분이다. 다들 바쁜 와중에 시간을 내고 날을 잡은 건데 취소해야하니. 그런데 어제도 그리고 내일도, 어쩔 수가 없었다.


약속을 취소하러 연락을 하는 것마저 지치는 하루였다.



6.

하지만 스스로에게 한 약속대로 아침 러닝을 했고, 저녁 때는 좋은 사람들과 만나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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