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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브티 내음

그랬어야만 했어

by 허브티

어려서부터 시력이 좋지 않았던 나는 초등학생이 되고 나서부터 안경과 함께 자랐다. 성장과 함께 시력도 달라지니 때때로 새 안경으로 바꾸어야 했다.

내 안경 인생에 강력하게 남아있는 사건이 있다.


우리 할아버지는 전통 유교적 사상과 생활 방식으로 평생을 사셨던 분이다. 종친회 사무실을 다니시며 족보 편찬하는 일과 잘못된 부분을 바로잡는 일을 하셨다는 것을 무척 자랑스러워하시고 대단하게 여기셨다. 집에 오시는 할아버지 손님들은 모두 우리 일가의 누가 어떻고 조상 묘가 어떻고, 늘 그런 말씀만 하셨다. 할아버지는 우리 가문 일이라면 늘 최우선 순위로 나서시곤 하셨다.

평소 지독하게 구두쇠이신 할아버지가 놀랍게도 알뜰살뜰 당신이 모아놓으신 용돈으로 새 안경을 맞춰 주시겠다고 하셨다. 마침, 우리 일가 먼 친척이 안경원을 하신다는 소식을 들으신 거다.


한창 더운 여름날.

미아동 집에서 상도동까지 한참 버스를 타고 또 한참을 걸어서 많이 숨차하시는 할아버지와 안경원에 도착하였다. 시력 측정을 하고, 테를 골랐다. 안경이 만들어지는 내내 할아버지는 안경원 아저씨에게 집안 대소사 말씀을 계속하셨다. 안경에 집중해야 할 아저씨에게 자꾸만 이야기를 건네셨다. 나는 끊이지 않는 할아버지 말씀이 지루하고도 한편으로는 왠지 불안하고 조바심도 났다.

드디어 안경이 완성되어 써보았다.

앗! 그런데 이상했다. 새 안경은 원래 적응이 필요하다는 것을 경험상 잘 알고 있었지만, 이건 유독 달랐다. 영 세상이 이상했다. 하지만 아무 말 못 하고 어찌어찌 인사를 하고 나왔다. 버스를 타러 걸어가는데 주변 풍경이 더 뿌옇고, 보도블록도 겹쳐 보여서 눈동자를 어디에 두어야 할지 도무지 모르겠는 것이다.

당장 안경원으로 돌아가서 아저씨, 눈앞이 정말 이상해요! 외치고 싶었지만, 멀어도 굳이 일가 집 안경원에 가서 그래도 하나라도 팔아 주었다고 무척 흡족해하시는 할아버지께 차마 이런 상황을 말씀드릴 수가 없었다. 멀리서 왔다며 안경 값을 깎아 주신 고마운 아저씨인데, 내가 다시 해달라고 하면 손해가 나시겠지? 할아버지는 내가 유난스럽게 까탈스러운 손녀라고 실망하시며 창피해하시겠지?

결국 난 아무 내색도 못 하고, 아무 말도 못 하고.

그랬어야만 했다.


학교에서 칠판 글씨를 보려면 한쪽 눈을 질끈 감고 외눈으로 쳐다보느라 꽤 여러 날 힘겨워했었다.

눈이 안경에 맞춰 길들기까지 그랬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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