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신호를 기다리는 시간

by 허둥지둥


‘섣불렀다’ 이런 생각은 왜 늘 행동을 하고 나서야 비로소 깨닫게 되는 걸까. 서른 넘어서 오른쪽 손목에 작은 문신을 세긴 건 성급한 선택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나에겐 그저 하나의 표식이지만, 때로는 이 문신이 타인의 시선 속에서 묘하게 불편하게 다가와 나를 멈춰 세운다.


“주말에 알바를 해야 돼서 이제 주말출근은 어렵습니다.” 회사를 다닌 지 1년쯤 되었을 때, 나는 그렇게 선전포고를 날렸다. 아쉬울 게 없었다. 이미 회사에는 진절머리가 났고, 몰래 연차를 내며 이곳저곳 면접을 보러 다니던 시기였다. 당황하던 팀장님이 이유를 물었고, 나는 거리낌 없이 털어놓았다. ‘이곳에서 받는 월급만으론 먹고살 수가 없어서요’ 그러자 팀장님은 ‘그래 너도 나이가 있으니까...’라며 수긍하시더니 한번 고민해 보자는 말씀을 하셨다. 그로부터 일주일 뒤, 나는 주말마다 햄버거 가게 마감조로 출근하게 되었다.

토요일 오후 4시. 정해진 유니폼을 입고, 거울을 보며 숨을 한번 고른 뒤 매장에 들어선다. 얼굴을 마스크로 가리고 일하는 것이 다행이었다. 얼굴을 감춘다는 사실이 오히려 편했다. 알록달록한 유니폼, 밝은 조명, 인위적으로 만든 친절 속에서 진짜 나의 얼굴은 보이지 않게 숨겨졌다. 그러나 감출 수 없는 게 하나 있었다. 오른쪽 손목 안쪽에 위치한 작은 모래시계 타투. 그것은 내 마스크를 뚫고 익명의 노동자 신분이 아닌, ‘나’라는 특정한 존재를 드러냈다. 계산대에서 손목을 내밀 때, 타인의 시선이 손목에서 멈추는 순간, 나 역시 잠시 멈춰 선다. 아주 짧은 정적과 스치듯 느껴지는 미묘한 표정의 변화 속에서 내 존재가 드러나 버린 것 같아 어색한 불편함을 느끼곤 한다.


처음 타투를 몸에 새길 때는 내 마음도, 다가올 미래도 선명해질 줄 알았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분명한 건 단 하나. 내 손목에서 머무르는 남들의 시선이었다. 그 시선들은 나를 불편하게 멈춰 세웠지만, 내가 지금 어디에 서 있는지를 묻는 신호 같았다.

내가 주말 알바를 시작한 진짜 이유는 ‘불안’이었다. 한국 사회에서 30대 중반 여성으로서 평균치에 한참 못 미치는 경제력, 그리고 이대로 가다간 언제 무너질지 모른다는 두려움. 안정되지 않은 삶, 저임금 구조, 불투명한 미래가 만들어낸 불안은 타투보다 더 오래전부터 내 안에 깊게 새겨져 있었다. 마치 내 혈관 속에서 불안이 흐르는 것만 같았다. 두근거리는 심장박동조차도, 언제나 가까이에서 불안이 살아 숨 쉬고 있음을 증명하는 듯했다.


가끔 생각한다. 어디에도 걸리지 않고, 누구의 시선에도 멈추지 않는, 공기 같은 평범한 사람이 되고 싶었던 건 아닐까?’ 30대 후반 미혼여성, 서비스직, 최저임금 노동, 그리고 타투. 이 네 가지는 실타래처럼 얽혀 나를 규정하고, 동시에 나를 멈춰 서게 한다. 감추고 싶은 노동, 감추고 싶은 표식, 그러나 결국은 드러나고 마는 감출 수 없는 현실이었다.


주말 출근길, 난 신호등 앞에서 선다. 빨간불은 멈춤을, 초록불은 출발을, 노란불은 망설임을 말한다. 불안은 모든 신호를 무시하게 했고, 나를 무작정 달리게 만들었다. 내가 누군지, 어디로 가고 있는지도 모른 채 무작정 앞으로만 향했다. 그러나 꽤나 묵직한 타인의 시선은 나를 멈추게 했다. 이 불편한 멈춤 속에서 내 현실과 상황, 그리고 부끄러운 면들이 낱낱이 드러났다. 그러자 비로소 나는 나 자신을 똑바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멈춘다’는 뭔가에 붙잡혀있는 상태만이 아니다. 잠시 멈춰 숨을 고르고, 다음 신호를 기다리는 순간이다. 혹은 지금 가는 방향을 바꿀 타이밍이기도 하다. 멈춤은 내가 서있는 자리를 확인하고, 어디로 가야 할지 고민해 보는 기회를 주기도 한다.

불안에 떠밀려서 앞만 보고 질주하는 삶도,

타인의 시선에 갇혀 박제된 삶도 아닌,

내가 원하는 삶을 향해 조금씩 나아가기 위한 출발점.


지금, 당신은 어떤 신호를 기다리고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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