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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날이 Jan 03. 2024

책장 정리

도쿄소비일기

내가 책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았던 엄마와 아빠는 책이라면 뭐든 사주셨다. 방의 한 면을 가득 채운 크고 높은 책장에는 책이 터져나갈 듯 꽂혀 있었고, 나는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대신 책을 읽고, 그림을 그렸다. 어딘가에 놀러 갈 때도 반드시 책과 스케치북을 들고 갔다. 시골 할머니댁으로 내려가는 기차 안에서 나는 실컷 그림을 그리고, 책을 읽었다. 학교에 들어가고 친구들과 노는 것이 좋아서 책을 멀리할 때도 있었지만 그때 그 습관이 남아서인지 지금도 여전히 나는 외출할 때마다 책을 들고 다닌다.


키치죠지의 작은 집에 살고 있는 지금은 작은 책장 세 개에 수납되는 만큼만 가지고 있다. 반은 나, 반은 남편, 반은 한국책과 일본책의 원서와 번역본들이다. 책을 계속 구매하는 나는 절대 처분하지 않을 책을 가장 잘 보이는 곳에 꽂아두고, 나머지는 다 읽고 주변 지인에게 선물하거나 중고 거래 사이트에 올려 줄이고 있다. 우리 둘의 책에 대한 취향은 확연히 다르다. 비즈니스, 자기 계발서가 주를 이루는 남편의 책장과 소설, 시, 에세이가 주를 이루는 내 책장. 남편은 현실세계를 알고 싶어서 책을 읽고, 나는 현실세계에서 떨어져 있고 싶어서 책을 읽는지도 모르겠다.


꽂혀 있는 건 줌파 라히리와 알랭 드 보통, 수전 손택, 하루키의 에세이 등이 있고 앞으로 읽을 책과 다시 읽을 가능성이 있는 책이 있다. 책장 정리를 하면 '아 후련하다'하고 기뻐하지만 얼마 못 가 또다시 책장이 꽉꽉 차고 넘친다. 물론 밀리의 서재, 리디북스도 이용하고 있고, 크리스마스 선물로 남편이 리디북스 20만 원을 충전해 주었지만, 종이책으로 소장하고 싶은 책도 있어 좀처럼 줄일 수가 없다. 나는 아무래도 책이 주는 감촉을 좋아하는 거 같다. 종이를 만졌을 때의 질감과 만듦새의 세세한 부분까지 감상하며 독서하는 시간이 좋다.


책장 정리를 하다 요시모토 바나나의 아르헨티나 할머니라는 책이 눈에 들어왔다. 남편이 한국 유학하고 있을 당시에 선물해 준 책인데 언젠가 같이 책방에 갔을 때 요시모토 나라의 일러스트가 귀엽다고 흘리듯 말한 걸 기억하고 사주었다. 첫 장을 넘기자 한자 위에 히라가나가 적혀 있어서 '어? 언제 내가 공부한 책인가?' 하고 페이지를 넘겨보니 아니었다. 남편이 한자 위에 하나하나 히라가나로 적어서 선물한 책이었다. 


첫 장부터 끝까지 히라가나로 가득한 책을 보고 일본어를 전혀 못했던 그때의 나를 배려한 남편의 마음이 너무 예뻐서 눈물이 핑 돌았다. 히라가나, 가타카나 하나 모르던 당시에 나는 일본어 공부에는 전혀 흥미가 없어서 거들떠보지도 않고 보관만 했었는데 10년 전 묻어 둔 타임캡슐을 열어본 듯한 기분이었다. 지금은 대부분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게 된 내가 신기하기도 하고 언제나 나를 먼저 생각해 준 남편이 고맙기도 했다. '이 책은 할머니 될 때까지 정리하지 말야지' 하고 혼자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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