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여미새의 변명

(짝) 사랑 전문 에디터가 선보이는 남자의 이야기


”그러니까, 너희가 클라이밍을 하고 롤을 하고 힙합을 듣듯이 내 취미는 사랑인 거야. “

야유와 반박이 쏟아진다. 어떤 감정이 든다.


"아니, 우리는 사랑을 먹고사는 동물이야. 사랑하고 싶고 사랑받고 싶은 욕구는 모두에게 있다고. 그걸 마치 있어선 안될 불결하고 수치스러운 것이 살갗에 엉겨 붙어버린 양, 악을 쓰고 거세해내야만 하는 이유가 대체 뭐야? 욕구에서 자유로워지려고? 글쎄, 그건 식욕을 초월하려고 금식을 하고, 수면욕을 초월하려고 잠을 안 자는 거랑 비슷한 거야. 그걸 뭐라고 하더라? 그래, 금욕주의. 뭐, 그런 거. 애초에 어떤 욕구가 인간에게서 근본적으로 분리될 수 없는 종류의 것이라면, 그것을 적극적으로 추구하는 행위에 대해 비난하는 것이 과연 온당할까? “


다소 흥분한 호흡을 잠시 고르고 말을 잇는다.


”나도 여미새와 남미새가 욕을 먹는 일 자체에 대해 아예 이해를 못 하는 건 아니야. 충분히 이해해. 그들은, 그들은... 그러니까, ‘추하거든.’ 아, 그들이 아니라 우리지. 아무튼, 이건 아마 본능적인 거부감. 뭐 그런 거라고 생각해. 남녀를 불문하고 본인의 성적 파트너가 너무 많은 이성관계를 갖는 건 유전자를 남기는 데 불리하니까. 동성의 여미새, 남미새도 비슷한 원리겠지. 한정된 파이를 두고 과욕을 부리는 경쟁자는 경계하는 게 더 번식에 유리하니까. 근데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누그러진 분위기. 어느새 옆 테이블의 사람들까지 아닌 척 이쪽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 목소리가 너무 컸다 싶어 조금 민망한 마음에 급히 톤을 낮춘 채 이야기를 이어간다.


”그런 감각이 너무 여과 없이 공격적으로 표출되고 있지 않냐는 거지. 어떤 속성이나 성질이 타인에게 불쾌감을 불러일으킨다고 해서, 해당 속성을 가진 사람에게 비난이 가해지는 것 역시 마땅하다는 결론으로 이어지는 것은 지성인으로서 무엇보다 경계해야 하는 의식의 흐름 아닐까?"


문을 밀고 들어오는 곤색 코트를 입은 여성. 검은 뿔테안경을 쓰고 머리를 치켜올려 묶었다. 눈으로 그녀의 움직임을 좇으며 떠오르는 대로 말을 대강 내뱉는다. 중요한 생각을 하는 듯 미간을 살짝 찌푸리고 꼭 필요한 곳에만 시선을 둔 채 얼기설기 걷는다. 멈춰 선다. 그러나 그녀의 나머지는 이곳에 없다. 


"결정적으로, '진짜 사랑'이라는 분류가 제일 웃겨. 만약, 그래. 삶의 마지막 날까지 영원히 지속되는 것만이 진짜 사랑이라면, 축복받은 극소수를 제외한 이 세상의 나머지 인간들은 진짜 사랑이란 걸 해볼 수가 없는 거 아니야? 그럼 그 소수의 인간들을 대단한 행운을 가졌다고 축하할 순 있어도, 나머지를 무능하거나 게으르다고 평할 순 없지 않나? 그렇잖아. 그러니까 결국 절대다수의 인간은 일생 내내 불완전하고 아마추어 같은 사랑을 하는 거야. 나를 포함해서."


잠시 간 서있던 여성이 우리의 앞을 지나쳐가 구석진 곳에 자리를 잡는다. 코트를 벗고 물건을 정리해 책상 위에 올려두는 정적인 몸짓이 자신에게 주목하라고 소리 지르는 듯하다. 적어도 나에겐 그렇다.


"그래서 난 만약 누군가가 내게 한 사랑의 끝과 다른 사랑의 시작 사이 시간적 간격이 너무 좁다는 점을 들어 내 사랑이 가짜라고 지적한다면, 글쎄, '그렇게 생각하시는군요.'라고 답할 거야. 자기가 생각하기에 그렇다는데 내가 거기다 대고 뭐라고 하겠어. '오, 제가 선호하는 적당한 간격을 당신은 선호하지 않으시는군요. 제 생각에 당신의 취향은 틀렸습니다.'라고 하는 건 웃기잖아. 음, 또 내 사랑에 대해 그건 진짜라기엔 인생에 너무 자주 찾아온다고 여길 수도 있어. 난 사실 그걸 나의 천부적인 뛰어난 재능에 대한 몰이해라고 생각해. 왜냐하면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는 사건은 인생에 몇 번 찾아오지 않는 아주 어려운 일인데, 내가 그걸 장난처럼 쉽게 해내니까 '그건 진짜 사랑이 아니'라는 식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는 거지."


불쾌한 표정들. 말을 꺼내려는 듯 움찔대는 입술들. 가장 즐거운 순간이다. 모욕을 깨닫고 "반격"을 가하기 전에 서둘러 다음 문장을 꺼낸다.


"아무튼 난 사랑을 시작하는 걸 그렇게 생각해. 너무 기능적인 면만을 조명하는 것이 아닌가 싶을 수도 있지만... 삶을 지속하는 데 필요한 의지력을 조달하는. 말하자면 연료 같은 거. 너희들이 아니라고 생각한대도 난 그 생각도 존중해." 느긋하게 고개를 주억거리며 승리를 만끽한다.


자리에 그 여자가 없다. 옷가지와 가방이 아까 그 자리에 그대로 놓여 있는 걸로 보아 아예 나간 건 아닌 듯하다. 어디로 갔을까?


그 순간, 오랫동안 듣지 못했던, 그러는 사이 머릿속으로 수없이 되뇌온 이름이 덜컥 예민한 부위를 건드린다.

"누구? 야, 씨발, 여기서 그 누나 얘기가 왜 나오는데... 새끼야."


어떤 생각이 든다. 이름 하나에 이렇게까지 반응할 건 아닌데, 아직도 그 기억은 단순히 이름이 불리는 것만으로도 나를 지배하고 있다. 하긴, 그 사람은 누군가의 삶의 목적이 되는 것에 있어서는 누구보다도 뛰어난 사람이었으니까. 그래서 그랬나. 그 사랑은 처음치고 너무 무거웠다. 인생의 거의 모든 무게중심이 자기 자신 바깥에 놓인 사람이 얼마나 불행할 수 있는지를 온몸으로 느꼈다. 나를 바짓가랑이에 덜렁덜렁 달고도 전혀 무리가 아니란 듯 사뿐히 뛰어가던 그 사람은 그러니까 처음부터 미울 수밖에, 사랑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사실 처음이 아니라 몇 번째였더래도, 그 사랑은 사랑이기엔 너무 무거웠다.



그래서 여자가 자리에 돌아오자 안심했다.


Editor. 변의


활자중독에 걸린 당신의 아카이브, Here you are.

구독 후에 히어유아 매거진의 다양한 소식을 받아보세요!

매거진의 이전글 진짜 개 때리고 싶은 소설 주인공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