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인, 재욱, 재훈 리뷰

어쩌다 직장인 독서일기 Vol.12

by 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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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속 영웅을 생각하다.


소셜미디어를 아무 생각 없이 스크롤하다가 종종 마음 따뜻한 소식을 만날 때가 있다. 최근에는 휴가를 가던 길에 소방관이 터널 속 차량 화재를 목격하고 침착한 사고 대응 및 초기 대처에 나선 덕에 대형 인명 피해를 막았다는 소식을 봤다. 해당 소방관은 배우자와 이동 중 사고를 목격했고, 위험을 직감한 배우자가 만류했지만, 자신의 직업의식을 발휘해 대처에 나섰다. 대형 사고로 번질 수 있는 일촉즉발의 위기 상황에서 자진해서 시민을 위해 나서는 그의 태도와 행동력에 마음 한켠 존경심이 우러나왔다. <재인, 재욱, 재훈>을 읽는 내내 그 뉴스가 머릿속에 오버랩 돼 ‘일상 속 영웅’에 대해 생각하는 계기가 됐다.


<재인, 재욱, 재훈>은 삼남매의 이름이 책 제목이자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소설이다. 장녀인 ‘재인’은 대전에 소재한 대기업 연구소에서 근무하며, 둘째인 장남 ‘재욱’은 중동에 파견된 엔지니어이다. 그리고 막내 차남 ‘재훈’은 늦둥이 고등학생으로 등장하는 캐릭터다. 정세랑 작가는 이 작품에서도 밀도 높은 묘사력으로 주인공 삼남매와 가족 구성원을 그려낸다. ‘엄마’와 ‘아빠’의 갈등 관계와 삼남매의 성장 과정을 압축적으로 제시하면서 독자에게 친숙하고 익숙한 가정을 소설에 담아내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3명의 주인공이 가족으로 묶이지만 대한민국, 중동, 미국이라는 서로 다른 배경에서 갈등이 벌어지고 해소되는 것도 소설의 현대성을 가미시켜주는 장치였다.


이 작품의 매력은 단순히 소설 속 주인공과 가정을 통한 스토리텔링에 그치지 않고, SF 세계관을 가미해 이들의 변화와 대응을 담아낸 것이다. 자칫 서정적 문장과 묘사로 가득한 현대 소설로 평가절하될 요소가 있는 지점에서 작가는 3명의 주인공에게 소소하지만 비범한 능력을 부여해 소설 국면을 전환시킨다. ‘재인’에게는 강철 같은 손톱을 ‘재욱’에게는 위험도를 확인할 수 있는 시각을 그리고 ‘재훈’에게는 엘리베이터를 조종할 수 있는 초능력을 갑자기 갖게 된다. 그리고 이 작품의 현실성 높은 묘사는 이들의 능력이 삼남매에게 동일 시점에 부여됐지만 ‘무덤덤한 대한민국의 삼남매’ 설정 덕에 각자의 능력에 대한 정보 공유가 없다는 것도 소소한 포인트이다.


<재인, 재욱, 재훈>은 이들의 소소하지만 비범한 능력이 각자의 위치에서 사람을 구하는 데 성공하는 것으로 이야기가 마무리된다. 동시에 이러한 능력으로 인간이 탐욕의 길로 빠지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구하는 것으로 연결된다는 것이 정세랑 작가의 매력이자 작품의 의의라고 생각한다. 특히 ‘재인’이 자신의 손톱에서 강력한 강성을 가진 가벼운 물질을 발견한 후의 행동이 인상 깊었다. '재인'은 자신의 손톱을 면밀히 분석할 수 있는 연구원이었지만, 상업적 이용을 고민하기보다 가장 먼저 동료들의 실험실 작업복에 보호막을 덧대주는 선택을 했다. 이 행동에서 독자의 한 사람으로서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에 대한 가슴 깊은 먹먹함이 올라왔다. 무엇보다 이 작품이 단순히 소설 속 얘기로 그치는 게 아니라, 글 서두에도 밝혔듯이 우리 일상에서 종종 발견하는 ‘영웅’이 있음을 환기할 수 있다는 게 기분 좋은 지점이었다.


물론 우리는 뉴스에서 각박하고 매몰찬 환경 속에서 좌절한 이들의 슬픔을 더 많이 목격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가 오늘을 살아갈 수 있는 이유가 있다. 각자의 위치에서 묵묵히 자신의 일을 하면서도, 위기의 순간에는 서로 연대하고 함께할 수 있는 시민 정신이 살아 있다는 믿음 때문이다. 정세랑 작가는 이러한 믿음을 소설로 잘 표현해낸다. 현대인의 일상 속 긍정의 힘을 우리 말로 소설에 아름답게 담아내는 작가여서 좋다. <재인, 재욱, 재훈>도 이러한 기대에 부응하는 작품이었다. 앞으로도 서점에서 정세랑 작가의 작품이 보일 때마다 주저 없이 작가의 세계를 들여다보게 될 것 같다. 올 한 해를 마무리하기에 참 좋은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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