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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수한그림일기]6개의 눈의 운명은 내 손에.

2023.6.12

by 수수한

작년까지 시력이 좋아서 방심하고 있었는데 작은 꼬마 시력이 이렇게 떨어졌을 줄이야.

정말 청천벽력이 따로 없었다.


전날 마지막 토마토를 입에 넣고 쩝쩝거리며 먹던 작은 입이 생각나 토마토공백을 막고자 사온 토마토.

씻어 스텐볼에 담아 아이 앞에 놓고는 아이 한 번 보고, 한숨 한 번 쉬고, 토마토 한 번 보고를 반복하며 선을 긋는다.


아이가 잠자리에 들고 편 책에서 이런 문장을 만났다.

"아들을 잃은 그녀의 마음이 어떨지 감히 헤아릴 수 없다. 지금 내 옆에 있는 두 아이가 잠깐이라도 위험한 순간을 경험한다고 상상하면 가슴이 철렁 내려앉고 마는데, 죽는다는 건 도저히 상상하기가 어렵다."

어쩌자고 책은 나의 순간을 알고 이런 문장을 들려주는 것일까. 시력이 떨어지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내내 무거운 밤이라 '도저히 상상하기가 어렵다'의 대목이 쉬이 지나쳐지지 않는다.


오늘 급하게 예약을 하고 일말의 희망을 가지고 두 꼬마를 데리고 병원을 방문했다. 희망은 회피할 수 없는 인정에 이르렀고, 큰 꼬마의 왼쪽눈, 작은 꼬마의 양쪽 눈의 렌즈를 맞추고 돌아왔다.

현실을 인정하고 나니 내 눈까지 총 6개의 눈알을 밤이고 아침이고 돌보아야 하는 신세가 된 나를 처량하게 여겨야 할 차례이다.


의사 선생님

"사실.... 저도 밤에 렌즈를 껴야 하거든요."라고 말씀드리니, 전혀 예상치 못한 말이었다는 듯 "아..."하고 멈칫하시더니 내 요구를 최대한 들어주시려 차트 위에 볼펜을 그었다 다시 썼다를 반복하셨다.

의사 선생님이 고심한 부분은 한정된 색상의 렌즈에서 최대한 헷갈리지 않을 만한 색의 조합을 찾아내신 것.


받아들여야 할 현실이라면 정신 똑똑히 차리고 살 궁리를 해야지. 당장 다음 주부터 새롭게 펼쳐질 6개의 렌즈의 밤과 아침이 두려워진다. 따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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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췌한 문장은

봉태규 작가의 <괜찮은 어른이 되고 싶어서> 중 2018년 12월 11일 태안화력발전소에서 일하다 컨베이어 벨트에 끼어 목숨을 잃은 비정규직 노동자 고 김용균 씨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빌며, 김용균 씨 어머니가 외치는 '일하다 죽지 않게, 차별받지 않게'의 목소리에 동감의 문장을 보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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