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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수한그림일기]우리만 통과할 수 있는 문

2023.6.13

by 수수한

세 번째 그림일기장 시작.

"세 번째 노트의 첫 장을 연다.

무엇이 달라졌는지 하나는 알겠다.

표지를 열자마자 첫 장에 그리고 있다."

다이어리든 스케치북이든 첫 장을 채우는 것은 부담이라 한 장을 넘기고 시작하곤 하는 나이기에 어제의 마지막 문장은 저렇게 썼다.

그러고 나서 지난 노트를 넘겨보는 순간 깜짝 놀랐다.

두 번째 노트부터 이미 첫 장에 그리고 있었어... 인간의 기억 왜곡이란.


"첫 권보다 두 번째 권의 그림이 더 나아졌나."라고 썼는데 또 깜짝 놀랐다.

어째 첫 권이 더 재미있는 것 같아... 더 다양한 레이아웃이 보이고 나중에는 익숙해진 구도가 자주 나오는 것 같고 말이야.

오늘과 시간적 거리가 더 먼 이야기라 더 재미있게 느껴지는 것일까.

이유야 어쨌든 시간이 흐를수록 더 나을 것이라는 오만과 착각이란.


작은 꼬마와 넘겨보면서

"이 파우치 어디서 그렸는 줄 알아?"

하니 손가락으로 내 침대 위를 가리키며 말한다.

"저기서 엎드려서 그렸잖아."


몸은 여기 있지만 같은 페이지를 보면

그 시간, 그 공간, 그 자세가 순간 머릿속에서 재현된다.

너는 너의 머릿속에서, 나는 나의 머릿속에서. 그러나 같은 곳에 도착하고 거기에는 우리 둘이 있다.

이 페이지를 열었을 때 그곳에 갈 수 있는 사람들은 우리 둘뿐이다.


두 권의 가득 찬 노트를 휘리릭 넘겨본다.

닿을 수 있는 문들이 여기 담겨있다.

내가. 그리고 그렸을 때 함께 있었던 나의 사람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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