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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수한 Jun 21. 2023

[수수한그림일기]든든한 5분 30초의 세계를 얻었다.

2023.6.21

그와 함께

감자 껍질을 까고 양파를 썰었다.


처음 몇 초만에 눈물을 핑돌게 한다.

우아하고 세련되었다가 위트 있고 경쾌해서 웃음 짓게 하다가 아름다워 이내 가슴이 미어진다.

고개를 좌우로 부드럽게 젓게 만들고

눈은 절로 감게 하고

허공에 손가락을 들어 피아노 치는 시늉을 하게 한다.

(내가 연주할 수 있는 악기는 피아노이므로.)

춤추듯 쾌활하게 스탭 하며 부엌을 누볐다가 다시 울컥하게 만든다. 내 심장을 쥐었다가 놓았다가 한다. 그때마다 내 마음도 뭉쳐 잠시 멈추었다가 놓아주는 순간 피가 흐른다. 눈자위는 몇 분 단위로 어김없이 시큰해진다. 목울대가 묵직해진다.


세상을 이롭게 하는 사람들은 어찌나 많은지 유튜브에 이 연주의 1시간 버전이 있어 요리하는 내내 이 과정의 반복이었다. 이 곡이 5분 30초이니 나는 부엌에서 5분 30초마다 이 과정을 홀로 반복한 셈이다. 지루한지도 모르고. 5분 30초마다 다시 사는 심정으로.


아. 어쩌자고 이 청년은 27세인데 세상 다 알고 있는 것 같은 감정을 담아 연주하는 걸까. 그리고 그 감정을 내 마음 한가운데에 톡 떨어뜨릴 수 있는 것일까. 단 한 번만에 반하게 하여 나의 하루를 바로 점령할 수 있단 말인가.


오늘 아주 맛 좋은 닭볶음탕이 완성되었다.

가족들에게 내며 말했다.

"양인모와 함께 만든 닭볶음탕이야."

큰 꼬마가 묻는다.

"누가 왔었어?"

"응, 내 마음속에."


가장 사랑하는 남자에게 새롭게 사랑하게 된 남자와 함께 만든 닭볶음탕을 내었다. 오후에 일하면서 들어보라고 보낸 톡에 듣고 집으로 돌아온 이 남자는 역시 가장 사랑받을 자격이 있다.


작년 여름에서 가을 넘어가는 내내 잔나비에 빠져 작년 나의 노래는 잔나비의 노래였는데, 올해 나의 음악이 이렇게 찾아왔다.

바이올린을 좋아하지 않았던 나를 단박에 빠져들게 만들면서.

사랑에 빠지면 속수무책인 나는 내가 익히 아는 이 감정이 찾아옴에 반갑다.


오지도 않은 내일까지 기대될 지경이다. 틈나는 대로 들을 거니까.

내 삶에 이 곡을 얻게 되었다니.

20년 전에 알게 된 후 언제 들어도 어김없는 기타곡 옆에 나란히 둔다.


양인모우아한 유령

바이올린 연주 


귀에 이어폰을 끼면 바로 무결한 세계에 당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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