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수한그림일기]잘 그리고 싶은 날은...

2022.08.30

by 수수한


이 작은 노트의 첫 장은 그저 잉크를 얼마나 견딜 수 있는지 확인해보고자 함이었다.

노트의 한 면은 딱 그 가벼운 마음만큼 작은 사이즈였고

천천히 선을 그리며 쓸 말을 고르는 일은

마치 걸으면서, 요가하면서, 목욕하면서 쓸 말을 고르는 일과 별반 다르지 않음을 알았다.


촉촉한 잉크가 말라 가는 것을 바라보며 다음 선을 그리는 일과

손가락 끝에 전해지는 종이와 만년필의 마찰감 자체가 재미있었다.

선을 그리는 동안 쓸 말이 생각나는 것은 덤이었다.


오늘은 문득 무엇을 그리나 허공을 바라보며 만년필을 만지작거리는 나를 발견하였다.

이러다가 더 나아가 잘 그리고 싶다는 욕심이 생길까 봐 덜컥 겁이 났다. 경계해야 하는 마음이라는 것을 안다.


이 마음이 드는 순간,

나는 지금처럼 가벼운 마음으로 즐겁게 그릴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욕심이 드는 순간 언제라도 그만두기로 마음을 먹었더니 향긋한 티가 떠올라 꺼내왔다.


잘 그리려는 욕심이 드는 날에는 아무것도 그리지 않을 테다.

그리고 싶은데 그릴 것이 생각나지 않는 날에는 콩알만 한 것을 그릴 테다.

콩알만 한 것이 무언지 생각나지 않는 날에는 진짜 콩을 그릴 것이고

어제 콩을 그렸는데 또 그릴 것이 생각나지 않는 날에는 쌀을 그리면 되지. 뭐.


세상에 나보다 잘 그리는 사람은 너무나 많고 나는 그들보다 잘 그리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다.


다만 내가 가지고 싶은 것은

남들보다 잘 그린 그림 한 장이 아니라

드문드문 빈 날짜가 있더라도 채워진 드로잉북.

하지만 그보다 더 가지고 싶은 것은

여기든, 저기든 매일을 쓴 자욱들이다.


그래. 내가 제일 가지고 싶은 것은 매일 쓴 자욱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