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장에 가지런히 꽂혀 있기도 하고, 책상 위에 몇 개의 책탑들이 되어 어지러이 쌓여 있는 것도 있다.
이사를 할 때마다 추려오는 과정에서 살아남은 책들과 그 후 새롭게 맞이한 책들이 나름의 질서로 구분되어 있다.
지금 소개하려는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책 <베르베르 씨, 오늘은 뭘 쓰세요?>를 읽으면서 나의 반려책들 중에 그의 책이 단연코 가장 많음을 알게 되었다.
90년대 초반 입사 후 신입 딱지를 떼기 위해 좌충우돌하던 중에 만났던 그의 책 <개미>, 그 후 그의 책이 나오는 대로 구해서 읽어 보려 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소설로만 만났던 그가 30년 작가 인생을 회고하며 쓴 자전적 에세이 <베르베르 씨, 오늘은 뭘 쓰세요?>는 베일에 가려졌던 60년 인생의 굴곡진 삶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고백하듯이 구체적으로.
◆ 책 읽다가 날것 그대로 쓰다.
베르나르 베르베르, 그의 책 <개미>를 읽고 또 다른 세계에 대한 놀라움을 가졌던 기억이 난다. 이 작가의 책을 개인적으로 가장 많이 읽었고 소장하고 있는 나. 소설을 넘어 이제 그를 더욱 잘 알게 되는 기회가 온 것이다. 기대 가득 설렘으로 GO! GO!.
어떻게 다섯, 일곱 살 때 기억을 이리도 상세히 기억하고 적어나가지? 그 당시에 쓴 일기라도 있었던 걸까? 나의 이 시절은 어렴풋한 장면 정도만 몇 기억날 뿐인데. 이 책에 따르면 그의 암기력은 나빴는지 몰라도 기억력은 정말 뛰어남을 알 수 있다. 이 책이 그 증거다.
'일곱 살... 그 때 처음으로 그림 없이 글자만 있는 두꺼운 책을 끝까지 읽었다.(p31)' - 와~대단하다. 나 어릴 적 두꺼운 책만 보면 어른들만의 공유물인 줄 알았다. 읽을 생각을 엄두도 못 냈었다. 그런데 그 당시 집집마다 돌며 전집 파는 아저씨가 있었는데 어머니께 떼써서 그것도 할부로 100권인가 200권인가 구입했던 기억이 난다. 결국 한 권도 제대로 읽지 못했고 어떻게 사라졌는지조차 기억에 없다. 그만큼 글자만 있는 책 읽기는 나에게는 너무나 힘든 일이었다.
'많은 초보 작가가 첫 번째 원고에 만족하고 싶은 유혹을 느낀다. 하지만 그 유혹을 이기고 다시 산을 올라야 한다. 이전 등반에서 좋은 기억만 간직한 채 다음 버전을 쓰기 위해 다시 산 밑에서 등산화 끈을 쪼인다.(p264)' 그의 소설 쓰는 과정을 보여주는 글인데 여기서 내 삶이 보인다. 30년 직장 생활. 많은 우여곡절을 겪으며 몇 번이고 그만두고 싶었던 걸 견디며 지낸 온 시절. 직장인의 꽃이라는 임원의 자리까지 올라 보고 퇴사한 지금. 여기의 글처럼 좋은 기억만 간직한 채 다시 다음의 삶을 산 밑에서 등산화 끈 쪼이고 등반을 시작하는 거다. 내 인생의 또 다른 버전을 계속 만들어 가는 거다!
- 헤리의 외면 일기
우리는 혁신을 도입해 급격한 붕괴의 위험을 감수하기보다 서서히 이뤄지는 침식을 택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 소심한 접근법을 합리화하기 위해 <전통>이라는 이 름을 갖다 붙이기도 한다. 하지만 악습을 전통으로 둔감시켜서는 안 된다.
몇 년 뒤 우연히 <식스 피트 언더>의 제작자 앨런 볼의 언론 인터뷰를 읽다가 인상적인 구절을 발견했다. <우리가 만든 TV 드라마가 큰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것은 여론 조사 결과 대중이 원한다고 알려진 것과 철저히 반대되는 것을 내놓았기 때문이다.>
명문 상업 학교 출신들이 방송과 영화를 비롯한 창의적인 분아의 경영을 맡고 있는 것이 혁신을 가로막는 요인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내가 만났던 드라마국장처럼 경제적 연구와 분석을 통해 대중의 욕구를 미리 재단함으로써 무색무취한 콘텐츠를 만들어 낸다. 그것은 결과적으로 제작물 전반의 하향 평준화를 초래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