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다크에서 사심 없는 차 한 잔

인도, 라다크

by 김성냥

따뜻한 차 한 잔 주고받는 일은 얼마나 좋은가. 처음 외국으로 연수 갔을 때, 이탈리아 토리노에서 내가 영어를 그리 말 못 하는지 처음 알았다. 프로그램은 따로 있었지만 로비에서는 매일 밤 그 많은 나라에서 온 사람들이 수다 대잔치를 열었다. 물론 공용어는 영어. 이것도 문제적이다. 아무튼, 난 거기서 그저 묻는 말에만 겨우 대답할 줄 아는 수줍음 많은 한국인이었다.


프로그램 자체는 영어로 준비해 간 프레젠테이션 발표하고 자료를 읽으면 됐기에 큰 무리는 없었지만, 사람들과의 자연스러운 대화에는 잘 참여하지 못했다. 문법에 맞지 않는 말을 하게 될까 봐 쫄아서 어버버 하다가 숨어버렸다. 내가 얼마나 웃기는 애인지 알려줄 수 없어 너무 아쉽고 억울했다. 심장까지 울렁거리는 영어 스트레스 때문에 누가 말 시킬까 봐 금방 도망가고, 너무 속상해서 밤에는 연수원 매점에서 몇 천 원이면 살 수 있었던 싸구려 와인에 쩔어 울기까지 했다.


낯선 외국 땅에서 마음 붙일 곳도 없이 말도 제대로 못 하고 찌그러져 있는 나를 유일하게 위로해준 건, 식당 에스프레소 머신이 내어주는 커피 한 잔이었다. 뭔지도 모르고 마셨던 카페라테. 우유 민감성 때문에 그 커피를 마신 후 가끔 배가 아프곤 했지만, 그 따뜻한 커피와 쫀쫀하면서도 부드러운 우유 거품이 미친 듯이 좋아서 설사를 각오하고 아침마다 그 커피를 마셨다. 아침에 그 커피를 마실 생각으로 잠이 깼고, 후다닥 씻고 드르륵 원두 가는 소리와 함께 무심히 차 한 잔을 내게 건네주던 그 기계 앞에서 깊은 위로를 받곤 했다.


기계마저도 위로 가능하니 사람이 따뜻한 미소와 함께 내어주는 차 한 잔이라면 얼마나 더 좋을까. 인도 라다크는 8월인데도 아침저녁으로는 쌀쌀했다. 난방이 안 되는 방에서 내 온기와 담요에 의지해 자고 일어나면 뼈마디도 굳어 있다. 몸을 어거지로 펴고 덜덜 떨면서 씻으러 가려고 방문을 열었더니, 차와 설탕, 우유와 찻잔이 담긴 쟁반과 보온병이 방문 앞 작은 탁자에 얌전히 놓여 있다. 게스트하우스 아주머니가 이른 아침 준비해주셨나 보다. 다른 방들도 보니 층마다 각 방 앞에 찻잔과 차와 보온병이 놓여 있다. 씻으러 가려던 걸 그만두고 쟁반과 보온병을 방 안으로 가져와 인도식 차, 짜이를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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쌀쌀한 날 아침에 따뜻한 차가 담긴 찻잔을 두 손으로 감싸 쥐고 호호 불어 차를 마시고 있으니 다정한 사람이 추위에 굳어진 내 온몸을 구석구석 다독여주는 것 같다. 고산증에, 고산증에 적응하기 전에 마신 맥주 덕에, 두통이 심해 이틀간 잠을 자지 못했다. 그리 뻑뻑해진 머리 속도 차 한 잔에 맑아지는 것 같다. 이 말없는 위로가 얼마나 큰지 맥락 없는 눈물까지 찔끔 나왔다. 차 한 잔이 굳은 몸뿐만 아니라 마음까지 무장해제시켰는지, 장기 여행에 지치는 동안 마음속 꼭꼭 눌러놓았던 서글픔이 북받쳤나, 찔끔 나온 눈물은 질질 짤 때까지 이어졌다. 인도 여행은 내내 고단하고 힘들었다.


너를 만지면 손끝이 따뜻해 온몸에 너의 열기가 퍼져 소리 없는 정이 내게로 흐른다...라는 김창완의 노래 가사. 뭔 끈적끈적한 에로틱한 가사인가 하겠지만 이 노래의 제목은 ‘찻잔’이다. 이 노래를 마음 그대로 이해할 수 있다. 그 찻잔이 주는 따뜻함과 소리 없는 정.


아주머니에게 오늘 아침 당신께서 나를 얼마나 행복하게 만들었는지 모르실 거라고 아침인사를 건넸다. 아주머니는 나를 행복하게 만들었다는 데 더 행복해하셨다. 까칠한 마음에 이렇게 차와 따뜻한 물을 주시고 돈 받으시겠지 했는데 그렇지 않았고, 아침의 따뜻한 차 대접은 숙소를 떠나는 날 아침까지 매일 이어졌다. 아주머니의 환한 미소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보면 절로 기분도 좋고. 라다크에서 머무는 동안 내내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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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감동시킨 무슬림 라다키 아주머니가 운영하는 게스트 하우스 이름은 JULAY다. 줄라이는 라다크 언어로 ‘안녕’ 혹은 ‘고마워’. 줄라이 게스트하우스 출입문 밑에는 가로 막대가 있는데, 이는 소와 말, 당나귀 혹은 양들이 집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장치이다. 라다크에서 유일한 가택침입 범죄자들은 이 동물들이다. 여기도 인도이긴 하지만 사람이 저지르는 사기나 범죄에 대해서는 얘기를 듣지 못했다. 여기서는 동물들이 정말 자유롭게 산다. 사람이 못 들어오게 막아놓은 문은 거의 못 봤다. 플라스틱 쓰레기를 만들지 않기 위해 10루피에 생수 리필하는 곳이 곳곳에 있는데, 아주머니는 ‘물 좀 주세요’하면 물도 그냥 리필해주신다. 받기만 하는 게 미안해 어제는 맛있는 스위츠를 사다 드렸다.


이슬람식 낮은 소파와 아름다운 쿠션으로 꾸며진 방 창가에 앉아 호호 불어 차를 마시면서 사심 없음의 고마움에 다시 감동받는다. 웬만해선 사심 없기가 쉽지 않다는 걸 알고 있기에. 조건 없는 환대와 사심 없음은 내게로 와서 나로부터 또 확장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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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스트하우스 창. 해도 잘 들고 낮은 소파와 다양한 쿠션들과 함께 이슬람 식으로 꾸며진 공간이 있어 저기 앉아서 차 마시고 있으면 무슬림 귀족이라도 된 듯한 좋은 기분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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