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메니아, 예레반
아르메니아 첫 번째 숙소의 주인장이었던 애나는 여러 모로 나를 놀라게 했다. 역대급으로 복잡하고 불편하기도 했다. 숙소 주인과 그리 뭐 복잡한 관계를 맺을 일이 있겠냐만은 애나와는 피해 갈 도리가 없었다.
아르메니아 대학살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는지. 19세기 말부터 1차 세계대전에 이르기까지, 오스만 제국이 아르메니아인을 두 차례에 걸쳐 무차별적으로 학살한 일이다. 얼마나 학살했냐면, 가해자인 지금의 튀르키예(터키)가 잡은 희생자 수만 20만 명이다. 아르메니아 측에서는 200만 명으로 추정한다. 어느 쪽 숫자가 맞는지 큰 의미 없다. 엄청난 수의 아르메니아인이‘집단적으로’‘학살당했다’.
왜 그랬는지, 가해 당사자에게 물어야 할 일인데 그들은 집단학살을 인정하지 않고, 강제이주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발생한 일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모든 가해자들의 뻔한 소리. 자기들도 내면의 악마를 들여다보기 무섭겠지. 특히 소비에트 연합 성립 이후, 여기 편입된 아르메니아는 학살에 대해 진상 규명하기 어려웠다. 당시 소비에트 연합은 민족주의를 경계했기 때문.
그렇게 진상규명조차 어려운 채로 묻혀 있던 이 학살은 소비에트 연합 해체 이후 국제사회 이슈로 등장했고, 프랑스는 2012년 ‘아르메니아인 대학살 부인 금지법’을 통과시키기도 했다. 실제 역사적으로 존재하는 사건을 부인하는 걸 금한다, 정도의 규정. 얼마나 아니라고 해댔으면 부인하는 걸 금지하는가. 지만원 때문에 우리나라에서도 ‘광주학살 부인 금지법’ 같은 게 언급되었던 기억이 있다. 식민지 민중에게 스스로 어떻게 했는지 프랑스에 ‘반성 먼저 필수법’ 같은 것도 있었으면 좋겠다. 또 아르메니아 대학살은 히틀러에게 잔인한 학살에 대한 아이디어를 주기도 했는데, 히틀러는 ‘누가 지금 아르메니아 학살을 기억하는가’라고 언급해 역설적으로 아르메니아를 기억하게 했다.
이 얘기를 제대로 하자면 애나가 얼마나 나를 불편하게 했는지 내일모레쯤이나 진상이 드러날 것이다. 아르메니아 대학살은 아르메니아를 여행할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꼭 챙겨봐야 할 역사다. 제노사이드 기념관이 아르메니아 수도 예레반에 있으므로 꼭 방문해보시길.
이 집단학살은 아르메니아 사람들의 뼈에 새겨져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예레반 사진 도서관에서 만난 마리나와 이 얘기를 해봤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이 한국을 식민지화하며 살인과 수탈을 자행했지만, 이에 대해 교육하지 않았고 친일파 청산도 평가도 제대로 안 되어 이제 젊은 사람들은 많이 잊기도 했다고, 우리 역사 얘기도 했다. 이제 22살인 마리나는 “우리는 그럴 수 없어”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그 일이 우리 피에 아직도 남아 흐르고 있어. 어떻게 잊을 수 있겠어,라고 덧붙이며.
그 일로 오래된 역사를 통해 유지되어 왔던 아르메니아 민족의 삶은 절단 났다. 특히 학살을 피해 다른 나라로 옮겨간 900만 명의 사람들이 100여 개 국에서 흩어져 살고 있다. 현재 아르메니아에 살고 있는 인구가 300만 명 정도이니 외국에 살고 있는 인구가 훨씬 많은 디아스포라 국가다. 이런 와닿지도 않는 어마어마한 숫자가 아르메니아 사람들 삶에서는 어떻게 구체적으로, 얼마나 비극적으로 남아있을까.
애나는 조부모를 대학살 당시 잃었다. 어머니, 아버지도 그 후유증에 병으로 잃었고 심지어 아들까지 죽었다 한다. 애나의 친족 전체는 아르메니아를 떠났고 지금 조지아에 흩어져 살고 있다. 애나는 자기가 7살 때부터 살던 아파트에서 떠나지 않고, 거기서 100년 다 된 역사까지 짊어지고 혼자 꾸역꾸역 살고 있었다. 소비에트 연방 해체 후 가스 전기가 10년 가까이 끊겼던 경험 때문에 아직도 고지서를 무서워한다. 네이티브 수준의 러시아어를 구사하고 러시아 문학을 전공한 재원이었고 교사로 일했지만, 소련 해체 후 직장도 잃었다. 소련 당시 필수였던 러시아 어가 더 이상 큰 쓸모가 없어져 해고당했다 한다.
애나의 아파트는 방 두 개, 화장실과 샤워실, 작은 거실을 포함한 부엌으로 구성되어 있다. 혼자 지내면서 방 두 개를 손님에게 내놓았고 자기는 주방에서 지내고 있었다. 주방의 붙박이 의자에서 먹고 자고 했는데, 주방의 의자는 너무 작아 그녀가 눕기도 벅차서 너무 미안했다. 손님이 없을 땐 자기 방으로 쓸 수 있는 공간에 내가 들어갔고, 나는 애나의 방을 빼앗은 꼴이 되어버렸다. 이런 상황이 부킹닷컴에 나오진 않는다. 뭘 잘못했는지도 모른 채 시작부터 불편함과 미안함을 느껴야 했다.
왜 방을 내놓았는지 모르는 나는 깔끔한 방 사진에 끌려 예약을 했는데, 그 방은 그냥 일상을 유지하던 개인의 방이었다. 그녀가 쓰던 컴퓨터와 사진, 개인 물품들이 가득했고, 애나는 종종 자기 물건을 꺼내가기 위해 방에 들렀다. 난 침대에 누워 음악을 듣다가도 난데없이 출현한 그녀 때문에 깜짝 놀라고. 아버지 사진, 개인이 쓰던 쿠션과 의자 등 사적인 물건들이 가득한 그녀의 방에서 초초 불안 상태로 이틀을 보냈다.
아침이 포함된 숙소여서 애나가 아침을 차려줬는데, 첫날 아침 애나 얼굴이 안 좋았다. 냉장고 열기 때문에 더워 못 잤다고, 진짜 못 잔 얼굴로 힘들어했다. 탄 빵에 눅눅한 채소들, 아침은 별로였다. 그리고 이어진 애나의 하소연은 그 아침을 더 기운 빠지게 했다. 맛없는 아침을 꾸역꾸역 먹으며 하소연도 견뎠다. 가끔 대꾸하고 공감해주면서.
저녁에는 뭐든 간식을 만들어놓고 나와서 먹으라고 불렀다. 멜론부터 쿠키, 빵 등 다양한 음식이 있었다. 또 묵묵히 간식을 먹으며 애나의 이야기를 들었다. 소련 해체 후 아파트에 전기와 수도가 끊겨서 11층까지 걸어서 물을 길어와야 했던 기억을 바로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얘기했다. 그때 생각을 하면 화가 많이 난단다. 젊은 시절을 다 낭비해 버렸다고. 그냥 수도에서 늘 물이 나오던 데 살았고 물값 걱정을 해본 적 없는 나는 그냥 고개만 주억거렸다.
이런 대화들이 오갔다. 그리고 지진 얘기. 집단학살 말고도 아르메니아 사람들을 이해하려면 지진 얘기를 해야 한다. 1998년에 발생한 지진은 또 사람들의 삶을 크게 흔들어 놓았다. 9만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는... 아, 그 지진 얘기가 애나를 또 울적하게 했다.
뭘 물어도 또 다른 슬픔이 나올 것 같아 그냥 입 닥치고 차려놓은 음식을 오래 씹었다. 모두 애나처럼 김 빠지고 신선하지 않다. 외출도 잘 안 하고 집에서 하루 종일 담배 한 갑을 피는 애나처럼. 이 집에 있는 물건들조차 매일 자신에게 주어진 우울에 매달려 사는 것 같다.
다음 날 아침으로 나온 빵도 너무 오래되었거나 타 있었다. 누가 이런 숙소에 평점을 높게 줄 수 있을까. 오래된 아파트여서 그랬는지 화장실 문은 잠기지 않았고, 화장실 휴지는 오래된 종이 같았다. 불 끄고 다니라는 지시, 자꾸 뭘 먹으라는 요구도 불편했다. 카즈베기에서 숙소 주인에게 받은 잼을 내놓으며 나눠먹으려 했더니 내가 만든 잼은 맛이 없다는 거냐며 슬픈 얼굴로 물어볼 때, 아냐 아냐 너 게 훨씬 맛있어, 얘기하면서 마음이 결국 닫혔다.
체크아웃도 안 했는데 지독한 락스 냄새를 풍기며 시작한 청소. 휴... 정말 당신을 어찌해야 한단 말이냐. 그렇게 힘들게 살며 우울을 짊어지고 사는 너는, 사람들이 자꾸 널 피하고 싶게 만든다는 걸 어떻게 말해야 한다는 말이냐.
어쩔 수 없었다. 다른 코멘트 없이 숙소 평점 10점 만점을 주고 결국 애나의 집을 떠났다. 그녀의 불행한 삶에서 놓여나고 싶었다. 뭘 만져도 되는지 안 되는지 지시받아야 하는 상황, 수건은 어디에 어떻게 걸어야 하는지 정해진 상황, 가끔 갑자기 소리 지르며 노노노를 반복하면 또 뭘 잘못했는지 주눅들어 놀라야 하는 상황, 너무 불편했다. 청소에 대한 강박이 있는지 소독제를 너무 많이 써서 매일 아침 머리가 아플 지경이었다. 청소해야 한다며 아침저녁마다 언제 샤워를 할 것인지 물을 때는 샤워하지 말까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에효, 이런 홈스테이 경험이 또 있을까. 다른 게스트가 청결하지 않다고 평점을 낮게 줘서 소독제를 쓸 수밖에 없다는 얘기를 50분 정도 듣고 나니 다른 평점을 줄 수가 없었다. 난 꼭 만점을 줄게... 약속까지 했다. 애나는 어떻게 해야 위로받을 수 있을까. 그렇게 떠났지만 그녀의 인생은 예레반 도시 전체를 배회하는 우울한 그림자의 집합체 같았다. 그래서 아르메니아를 더 이해했고 아르메니아가 더 불편해졌다. 가해자가 인정하려 들지도 않는 비극적 역사에 짓눌린 개인은 도대체 어떻게 목숨을 유지하고 살아야 하냔 말이다.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은 의문. 괴롭고 힘든.
애나는 부엌에서 창밖을 보며 담배를 폈다. 양해를 구했으나 그건 통보에 가까웠다. 비만 상태인 몸이 힘든지 가끔은 앉아서 창밖을 봤다. 왜 슬픈 상태에서 자신의 고통만 반복해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거기에 머물러 있는 걸까, 란 의문은 쓸모없었다. 너무 크게 지속된 불행에 장시간 익숙해지면서 계속 슬픈 상태에 있는 게 삶의 기본값이 되어버리고, 지독한 트라우마 이후에 행복해지는 걸 꺼리게 되어버린 한 사람. 자신의 불행과 고통을 반복해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그래서 불행을 유지하는 게 운명처럼 되어버린 한 개인의 삶을 두고 누구 탓이라도 하고 싶었다. 애나와 이박삼일을 지낸 외국인인 나는 그 시간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괴로웠으니 그저 한탄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