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만히 있으면 가마니로 보고, 묵묵히 일하면 묵사발낸다

조직은 정의가 실현되는 곳이 아니다.

by 헤르메스의 편지

직장에 동일한 시기에 함께 입사한 사람들이 있다고 하자.
모두 같은 채용시험을 통과해 들어왔고, 능력도 엇비슷하다.

하지만 첫 역할 배정은 여러가지 요인때문에, 동기라 하더라도 천차만별이다.


어떤 사람은 꽃밭에서 잡초를 뽑는 일을 맡는다.
비록 힘든 잡초 제거일지라도, 향기로운 꽃내음을 맡으며 쾌적한 환경에서 일할 수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가능한 한 꽃밭에 배치되기를 바란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시궁창에서 오물을 치우는 일을 맡는다.
냄새나고 지저분한 곳에서 일해야 하고, 일 자체도 고되다.

누구도 가고 싶어하지 않는 자리다.


물론 직장에서는 순환근무제이기 때문에

언젠가 역할은 바뀔 거라고 말한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나는 오물을 치우는 업무에 배치된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에 따라,

그 역할이 계속될 수도, 바뀔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묵묵히 오물을 열심히 치우고 일하는 사람.
자기 일 열심히 하고, 불만도 표출하지 않으며,

늘 ‘누군가는 내가 희생하고 고생하는 거 알아주겠지’라고 생각하는 사람.

그런 사람일수록 역할은 잘 바뀌지 않는다.


사람들은 그런 그에게 위로의 말을 건넨다.

“너무 힘들겠다. 너 고생하는 거 다 알아. 언젠가 좋은 날이 올거야.”

오물을 치우는 일은 아무도 하고 싶지 않은 업무이기에,

그 사람이 묵묵하게 자기 할 일을 한다면 모두들 고마워하고,

그 사람에게 위로를 전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건 그 사람이 혼자 희생하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 사람에게 친절할 뿐인 것이지,

그 사람의 인격이 훌륭한 것을 감탄해서 찬양한다든지,

그 사람이 잘 된다고 생각해서 하는 행동은 아니다.


그 사람만 가만히 있으면 직장 내 많은 사람들이 행복하다.


꽃밭에서 꽃같은 업무만 하는 사람들은

아무도 자기를 견제하지 않는다면,

자기 혼자 주구장창 꽃밭에서 일하고 싶어할 것이다.


인사팀은?

아무도 문제제기를 하지 않는다면 자기들도 편하게 일할 수 있다.

따라서 그대로 인사배치를 진행한다.


그 사람에게 일시키는 상사들은?

그 사람이 빠지면 인력 충원도 쉽지 않을거고,

(다들 가기 꺼려하기 때문) 새로운 사람이 온다고 해도

그 사람이 적응할 때까지 본인들이 일을 해야해서 피곤하다.

따라서 그 사람이 묵묵히 역할을 수행해주면 좋아한다.


결국 시궁창에서 일하는 사람들묵묵히 일을 열심히 할수록 계속 시궁창을 맴돌며 오물을 치우는 일만 할 확률이 높다.


이것이 곧 묵묵히 일하면 묵사발이 되고, 가만히 있으면 가마니로 보는 직장의 구조다.


물론 인사팀이 가만히만 있지는 않는다.

만약 순환근무를 제대로 시행하지 않는다면

오물을 치우는 사람들이 단체로 반발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반발의 정도가 약한 사람들

이상하게 시궁창같은 상황에 한번씩은 더 권유받게 된다는 것이다.


나는 입사하고나서 한 동안 오물을 치우는 역할 계속 수행했다.
일도 제대로 배우지 못한 상태에서,

내가 문제를 제기하면 사람들이 날 문제 직원으로 볼까봐 조심했다.

불만을 말할 용기가 없었다.

갈등이 무서웠다.

그래서 갈등이 일어날 상황이 될 것 같으면,

그냥 내가 상대방보다 좀 더 손해보는 듯 일을 더 해서 그런 상황을 피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느꼈다.

"나, 지금 희생양이 되는 중인가?"


그리고 깨달았다.
묵묵히 일하면 대접은커녕, 제일 먼저 희생양이 된다는 사실을.


하나둘씩 내가 불이익을 감수해야 하는 일이 늘어났다.

다른 누구보다 먼저 힘든 일, 불합리한 일들이 나에게 먼저 오기 시작했다.
내 위의 상사들과 인사팀은 내가 잘 참는 걸 아니까, 더 편하게 나를 활용하는 것 같았다.

더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일을 거부했고, 부당함에 맞서 항의했고,

조직도 혜택을 보고 나도 혜택이 되는 구조일 때에만 일하겠다는 기준을 세웠다.


놀랍게도,
그때부터 나를 대하는 회사 분위기가 달라졌다.


나를 배려하기 시작했고,
내 말을 들어주기 시작했다.
심지어 정당하게 대우해주니 내가 훨씬 잘 일하게 되더라는 것이다.

그 때 느꼈다.


'아, 나는 그 동안 가마니 취급을 당하고 있었구나.'


직장은 정의가 실현되는 곳이 아니다.
누군가 부당하게 희생당하더라도,
그 사람이 스스로 목소리를 내지 않으면,
아무도 그 부당함을 모른다.

혹은 모른 척한다.


그렇게 그 사람의 존재는,
천천히 조직 안에서 지워져 간다.


누군가 당신에게 “묵묵히 잘 참아줘서 고맙다”고 말한다면,

그건 좋은 의미가 아닐 수 있다.

당신이 계속 그 시궁창 같은 상황을 잘 참아내길 바라는 말일 수도 있다.


부당한 대우가 반복된다면,
용기를 내라. 목소리를 내라. 싸워라.

아무도 대신 싸워주지 않는다.

그리고, 생각보다 조직은 당신이 당당할 때 더 잘 대해준다.


물론 당당하게 행동했을 때 좋은 대접을 받으려면

회사에 이익이 되는 역할을 할 수 있을 정도의 업무역량은 갖추어야 한다.


덧붙여 말하자면, 조직에 맞서 싸우는 것도

초창기에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아직 조직에 이익이 될 정도로 업무 역량이 키워진 것도 아닐뿐더러,

부당한 대우를 받는다고 판단이 되려면 사실 시간이 몇 년은 지나봐야 안다.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조직 차원에서 제대로 평가가 나오기도 전에

섣불리 당신이 조직에 맞서 싸움부터 한다면

그땐 그냥 '빌런'(업무능력도 없고, 성격이 더러워 조직이 관리하기 어려운 인물)으로 찍힐 위험도 있다.

빌런으로 찍힌 후라면, 아무리 조직에 당당히 본인의 대우를 요구해봤자 딱히 들어주지 않고,

오히려 당신을 시궁창으로 계속 보낼 수도 있다.(그냥 회사를 나가라는 뜻..)


어디까지나 이 글은

묵묵히 자기 할 일만을 열심히 하는 사람들을 위한 글임을 다시 한번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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