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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상예술가 정해인 Apr 29. 2019

새벽 4시 2분

걷기 단상

새벽에는 불이 켜진 집이 몇 곳 없다.

겨우 아파트 한 동에 한 집 정도 불이 들어와 있다.

달빛이 은은한 길에는 노인들만 보인다.

마치 젊은이는 모두 사라진 세상 같은 느낌이다.

아침 6시가 넘으면 그나마 달리는 사람이 많지만 새벽 4시에 달리는 사람은 그리 흔치 않다.


걷다 보니 길 옆에 왕복 6차선 고속도로가 보인다.

도로 위로 자동차가 귀가 터질듯한 굉음을 내며 지나간다.

마음속 생각 역시 마치 자동차가 지나가듯 계속 휙휙 지나간다.

처음에는 내 손으로 그 생각들을 잡으려고 애썼다.

하지만 내 걸음인 시속 10km에도 못 미치는 속도로 도로 위의 차를 따라잡지 못하듯 이내 생각이 떠나버렸다.

그래서 음성 메모로 바꿔서 녹음을 해 봤지만 그 역시 느릿느릿 가는 버스 속도로 생각을 따라잡지 못했다.

머리에서 말로 가는 짧은 이동의 순간에도 많은 생각들이 사라졌다.

그래서 기록으로 남은 생각들은 예상보다 많지 않았다.


박준 산문집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이란 책을 보며 걷기에 대한 생각을 한 번 해보았다.



109페이지 "일상의 공간, 여행의 시간"중에서


내가 그곳에서 가장 자주 한 일은 걷는 것이었다.

밥을 먹고 걸을 때도 있었고 끼니를 거르고 걸을 때도 있었다.

별을 맞으며 걸었고 비가 오는 날에도 걸었다.

걷고 있는 시간만큼은 미래에 대한 막막함이나 글쓰기에 대한 두려움, 내가 스스로 세운 목표에 대한 중압감 같은 감정들을 조금 내려놓을 수 있어 좋았다.


대신 발이 아프다, 목이 마르다, 버드나무는 수피의 색이 유독 진하다, 같은 직관적인 생각들을 자주 했고 오래전 누군가에게 했던 허언들을 되새기거나 보고 싶은 사람을 두엇쯤 떠올려보기도 했다.

     


하루에도 수십 번 고민이 떠오른다. 미래에 대한 고민, 일에 대한 어려움, 직장 생활의 스트레스 등등 많은 것들이 머릿속을 짓누른다. 그렇게 머리가 무거운 채로 잠들었다가 다음날 아침 직장으로 돌아가 일을 하다 보면 스트레스가 쌓인 채로 다시 일을 맞이한다.


새벽 4시에 일어나 미친 사람처럼 정신없이 걷다 보면 생각도 많지만 그만큼 머릿속의 생각도 많이 비워낸다.


발바닥으로 전해지는 내 육중한 몸의 느낌

평소에는 느끼지 못했던 스마트폰의 무거움

새벽 공기가 주는 가벼운 신선함

텅 빈 고요한 거리를 달리는 상쾌함

계속 쌓여가는 발걸음의 숫자들


박준 작가의 말처럼 걷거나 달리는 그 순간만큼은 이런 여러 가지 고민들을 모두 잊어버리고 운동하는 그 순간에 집중하게 된다. 오늘 아침 걷다 보니 앞에 달려가는 노인 아저씨의 등에 적힌 문구를 보고 웃음이 났다.


"Run Hard or Go Home"


그 문구를 보고 나니 '그래, 달리는 순간만큼은 달리기에 집중하자. 그렇지 않으면 집에 가서 잠이나 자던가.'라고 할아버지가 마치 나를 보고 이야기하는 듯싶어 딴생각할 겨를도 없이 계속 걸었다.

 



내일도 걸음과 함께 머리를 비우고 생각을 리셋하기를 바라며 집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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