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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상예술가 정해인 Jan 08. 2021

욕망에 솔직해지자

인간이 그리는 무늬(최진석, 소나무)

간단 요약 

  인문학이란 결국 나를 찾는 것이다. 나라는 것은 자신의 욕망으로써 표현된다. 이 욕망은 살아있음, 즉 생명력 있는 활동에 있다. 욕망을 찾는 일은 운동, 글쓰기, 낭송을 통해 자신에게 접근함으로써 가능하다. 


담고 싶은 문장 3가지 

자기가 무엇을 먹고 싶은지조차 모르는 사람, 이건 "죽은 사람"입니다. (p.69)


  점심 메뉴를 정할 시간이 되었다. 동료에게 “무엇을 먹을 거야?”라고 물었다. 그랬더니 우리나라에만 있는 메뉴를 이야기한다. “아무거나” 그렇게 세상에도 없는 “아무거나”를 고른 사람에게는 개중에 소신 있는 동료가 고른 메뉴가 주어지거나 다른 사람이 가장 많이 고르는 메뉴가 주어진다. 아마도 그건 나보다 우리를 중시하는 문화가 영향을 미치는 건 아닐까? 인문학은 자기가 정말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찾는 일이다. 


  사람들에게는 우리라는 단어가 익숙하다. 우리나라, 우리 아들, 우리 엄마. 그렇게 숱한 “우리”를 쓴다. 그런데 그걸 영어로 번역한다면 어떻게 될까? 국가야 그렇다 쳐도 아들, 엄마는 공유의 개념은 아니다. My son과 My mom이 있을 뿐이다. 사회라는 압박에 못 이겨 우리는 나라는 개인을 포기하고 있는 건 아닐까? 


"내가 다른 것의 노예로 살고 있지 않은가?" 하는 질문을 항상 자기한테 해야 돼요.(p.79)

   나는 행복이란, 객체가 아닌 주체로 사는 것이란 생각을 해본다. 삶의 주도성이 사라지는 순간 행복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이 돈 때문에 나가야 하는 직장이라면 직장인은 선택권이 없는 객체가 된다. 그래서 사람들은 회사가 마음에 들지 않을 때마다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자영업을 꿈꾼다.(그렇다고 자영업이 무한정 자유를 누리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돈의 노예. 명예의 노예. 권력의 노예. 우리가 하는 행동에는 어떤 동기가 있기 마련이다. 그 동기가 내 안에서 자발적으로 일어난 것이 아니라면, 즉 동기를 자신의 뜻대로 움직일 수 없다면 그 삶은 내가 아닌 다른 것의 노예로서 사는 삶이 되는 것이다. 그런 삶이 행복해지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숨이 목까지 차올라 옅은 피 냄새가 올라올 정도까지 죽어라 달려봐야 해요.(p.266)

  작년과 재작년 그전에 비해 많은 거리를 달렸다. 지은이가 이야기한 대로 다리가 끊어질 만큼, 숨이 막혀 헐떡거릴 만큼 뛰어본 적이 있다. 목구멍 저 밑에서 옅은 피 비린내가 올라왔다. 여기서 조금 더 달리면 죽겠다 싶을 만한 그런 느낌이었다. 그런데 그 순간 알 수 없는 평온함이 느껴졌다. 삶의 모든 고민이 사라지고 오로지 생과 사 하나만이 남았다. 그래 어떤 고민이든 내가 죽는 순간 모든 것이 덧없는데 난 왜 고민하고 있지? 조금이라도 숨을 쉬어 살고 싶다는 생각 이외에는 모든 생각이 사라졌다. 

  아마도 그렇게 자기의 한계로 자신을 밀어 넣을 때 진정한 자아와 마주하는지 모른다. 평소에는 자신이라는 모습은 짙은 안개에 싸여 보이지 않다가 한계에 다다랐을 때가 되어서야 진정한 모습을 살짝 보여주는 것은 아닐까? 


단 한 줄을 기억해야 한다면

"오직 자신의 욕망에 집중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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