낡음에서 편안함을 찾다.
최신식 스터디 카페를 뒤로 하고 연식이 오래된 도서관을 찾았다. 집 근처에 있는 것도 아니고 시설이 좋은 편도 아닌 도서관으로 갔다. 자주 가는 도서관이 오늘은 휴관인지라 평소보다 조금 멀리에 있는 도서관을 찾았다.
가는 길부터 쉽지 않았다. 언덕 위에 지어진 도서관을 가려니 경사진 길을 한참 올라야 했다. 공부를 위해 잔뜩 가방에 책을 넣었는데 등으로 땀이 주르륵 흐른다. 이렇게 땀을 빼고 체력이 방전되었는데 도서관에 도착하면 집중이 되겠나 싶다.
도서관 이용증을 뽑아 자리로 올라가본다. 다른 사람이 앉아 있다. 그냥 모른척하고 다른 자리에 앉으려다 내 자리를 두고 다른 사람 눈치를 보기가 싫어 자리에 앉은 이에게 이야기했다. 혹시 번호가 몇 번이냐고? 앉은 사람은 무안한 표정을 지으며 옆자리로 이동한다.
원래 계획은 한숨 돌리고 공부를 시작하려 했는데 기어이 앉은 사람까지 밀어내고 앉음 자리를 비워두기가 신경이 쓰인다. 아저씨 덕분에(?) 강제로 공부 모드에 돌입한다.
자리에 앉아 가지고 온 책을 펼치며 낡은 도서관의 공기를 깊게 들이마셨다. 퀴퀴한 책 냄새와 먼지 섞인 공기가 코끝을 스친다. 스터디 카페의 깨끗함과는 다른, 세월의 흔적이 담긴 이 공간의 향기가 묘하게 편안하다.
어쩌면 나는 처음부터 이런 낡은 공간을 찾아 헤맸는지도 모른다. 삐걱거리는 나무 의자와 낡은 책상, 희미하게 변색된 형광등 불빛까지. 모든 것이 완벽하게 불완전하다. 그 불완전함 속에서 오히려 마음의 여유를 찾다니 참 아이러니하다..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도시의 번잡함과는 거리가 있다. 산 정상에 도서관이 있다보니 나무가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이 창문을 통해 희미하게 보인다. 잠시 바깥을 바라보다 문득 깨달았다. 이 오래된 도서관은 시간의 속도가 다르게 흐르는 곳이었다.
스마트폰을 꺼내들고 SNS에 올릴 사진을 찍으려다 멈칫했다. 흐릿한 조명 아래 책장에 빼곡히 꽂힌 오래된 책들의 모습이 카메라에 담기기엔 너무 소박했다. 하지만 그 소박함이 바로 이 공간의 진짜 가치인 것을 어렴풋이 느낀다. 굳이 사진으로 남기지 않아도 이 순간의 감각은 내 기억 속에 더 선명하게 남을 테니.
도서관 한쪽에는 청소년들을 위한 만화책 코너가 보였다. 내가 어릴 적 읽었던 책들이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모습에 미소가 지어진다. 세월의 변화를 견디며 그 자리를 지키는 이 책들처럼, 나도 내 자리를 지키려 노력하는 중이다. 바깥세상은 끊임없이 변하지만, 이 오래된 도서관은 그 변화의 속도를 늦추는 방파제 같은 역할을 한다.
공부는 생각보다 잘 되지 않는다. 하지만 이상하게 조급함이 들지 않는다. 언덕을 오르며 흘린 땀방울과 함께 조급함도 어디론가 흘러간 듯하다. 옛날 책들이 가득한 이 공간에서는 시간에 쫓기는 마음마저 느려지는 것 같다.
잠시 책에서 눈을 떼고 주변을 둘러본다. 나 말고도 몇몇 사람들이 각자의 세계에 빠져 있다. 키보드 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이 고요함이 귀를 맑게 해준다. 스터디 카페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공동체적 고독, 함께 있지만 방해받지 않는 편안한 거리감이 여기에 있다.
오래된 책장을 지나치다 우연히 눈에 띈 시집 한 권을 꺼내 들었다. 페이지 귀퉁이가 살짝 접혀 있고, 누군가 연필로 밑줄을 그어놓은 흔적이 남아있다. 그 흔적들이 이 책을 더욱 특별하게 만든다. 완벽하게 깨끗한 새 책이 아닌, 누군가의 시간과 감정이 스며든 책. 그 낡음 속에서 이상한 위로를 느낀다.
세상은 점점 더 새롭고, 빠르고, 완벽한 것을 추구한다. 하지만 가끔은 이렇게 낡고 불완전한 것들 속에서 더 깊은 안정감을 느끼는 자신을 발견한다. 우리의 삶도 결국은 이런 낡음의 과정을 통해 더 풍요로워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창문 너머로 해가 기울기 시작한다. 오래된 목재 책상 위로 황금빛 햇살이 드리워지는 모습이 아름답다. 깊은 숨을 들이쉬며 책을 덮는다. 오늘의 공부는 책 속 지식보다, 이 오래된 도서관이 내게 가르쳐준 여유와 편안함에 관한 것이었다.
언덕을 내려가는 발걸음이 올라올 때보다 가볍다. 내일은 다시 새것들로 가득한 세상으로 돌아가겠지만, 가끔은 이렇게 시간이 천천히 흐르는 낡은 공간을 찾아와 나만의 여유를 찾을 것이다. 낡음 속에서 발견한 편안함을 기억하며, 나는 오늘도 도서관 아재로서의 작은 행복을 간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