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다면 당신은 나의 동년배
사랑니를 뺐다.
이 문장이 익숙하다면, 당신은 나의 동년배일 것이다. 위 문장은 동방신기 팬픽 사상 큰 획을 그은 <가시연>의 첫 문장이다. 나에게 팬픽은 한국문학 그 자체였다. 이렇게나 글을 잘쓰는 사람들이 나와 같은 가수를 좋아한다는 게 벅찼고 기뻤다.
그때는 나 말고도 많은 이들이 팬픽 작가를 동경했다. 유명한 팬픽 작가들의 학벌을 정리해놓은 짤이 떠돌아 다녔으며 <가시연> 작가님이 사실은 도덕 선생님이더라, 하는 말들도 돌았다. 그 시절 팬픽 작가는 팬들 사이에서 거의 인플루언서였다. 얼굴과 이름 없이, 오로지 글과 오빠들을 향한 사랑만 존재하는.
어렸을 때 나는 양쪽 시력 모두 1.5였다. 엄마와 동생이 안경 쓰는 게 멋있어 보여서 눈이 나빠지기 위해 가까이에서 티브이를 보고 시력검사를 가짜로 했지만(당연히 들켰다) 그래도 시력이 좋았다. 내가 눈이 나빠지기 시작한 건, 고등학교에 올라와서 밤에 불 끄고 팬픽을 읽게 된 순간부터였다. 다른 사람들은 공부하느라 시력이 나빠진다던데. 이런 생각을 할 때면 저절로 숙연해진다.
팬픽을 많이 읽는 사람들은 국어 성적이 좋냐는 질문을 인터넷에서 몇 번 본 적이 있다. 댓글엔 ‘따로 공부를 안 해도 국어는 늘 1등급이었다.’ 하는 간증이 간간이 보였다. 그러나 나는 국어를 사랑했지만 잘하는 학생은 아니었다. 아주 열심히 노력했음에도 1등급은 받아본 적이 없고 늘 2-3등급을 왔다갔다 했다. 그러나 그 시절 팬픽으로 키운 문학 사랑은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다. 대학에서도 문학을 전공했다. 지금도 나의 가슴 언저리엔 <뱀파이어 하우스>나 <그스비>, <백색지연인> 같은 작품들이 남아있고, 그것들은 내가 글을 읽고 쓸 수 있는 근간이 되어준다.
그러나 지금은 팬픽을 전혀 읽지 않는다. 팬픽에 대한 나의 기억은 2015년에 멈춰있다. 요즘엔 팬픽 아니고 ‘포스타입’ 이라는 플랫폼 명칭을 줄여 포타라고 한다던데. 커플링이 아니고 CP. 동방신기 팬픽인 <21c 인어공주를 위하여>에 나오는 몸에 미역국 엎어버리는 씬 같은 게 요즘 나온다면 비도덕적이라고 엄청난 비판을 받는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팬 문화 역시 시대의 흐름에 따라 계속 진보하고 있다.
사실 팬픽에 대해 할 이야기는 정말 많다. 2세대 아이돌의 팬픽을 재밌게 읽은 사람을 만난다면 하루종일 떠들 수도 있다. 학창시절 내가 향유할 수 있었던 거의 유일한 취미였으니까. 나를 문학으로 인도해준 팬픽 작가님들의 닉네임을 반추해본다. 아주 무수한 세월이 흘러도 나는 잊지 못할 것이다. 오늘 밤엔 오랜만에 예전에 좋아했던 작품을 다시 찾아봐야겠다. 그때와 같은 마음으로 즐길 순 없겠지만, 아무렴 좋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