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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수은 Mar 27. 2022

세상에 당연한 것은 없다.

코로나19가 나에게 준 변화.

햇살이 따스히 비치는 방안 작은 침대.

한 여인이 침대에 누워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다.

졸린듯한 그녀의 눈은 옆에서 자신의 손을 잡는 이를 바라보며 아무 말 없이 깜박이는데 그 침묵을 깨며 말소리가 들려온다.

"엄마가 이제 하늘나라에 갈 거야, 잘 가라고 인사해주자." 덤덤한 듯 하지만 눈물을 삼키는 듯한 목소리를 듣고 '엄마, 사랑해.'라고 아이가 말한 후 얼마 뒤 한 여인은 머나먼 여행을 떠났다.


위 내용은 엄마와의 영원한 이별을 앞두고 보았던

임종에 대한 영상의 내용이다. 사랑하는 가족들이 지켜보는가운데 다정한 인사를 나누며 죽음을 맞이하는 가족의 모습을 보며 막연한 두려움과 슬픔에 마음이 아팠다.


그다지도 못 잊어하던 딸의 얼굴을 끝끝내 보지 못하고 외로이 숨을 거두는 어머니의 임종을 눈앞에 그려 보니 쌓이고 쌓였던 묵은 설움이 북받쳐 올랐다.   <<심훈, 상록수>>


부모가 돌아가실 때 그 곁에 지키는 임종(臨終).

몇 년을 아파 고생한 엄마를 잘 보내주리라고 그 순간을 함께하며 지켜주고 싶었지만 소설 속 인물처럼 나는 엄마의 임종을 지키지 못했다. 몇십 년을 살다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가는 죽음의 순간. 극히 짧은 시간(時間)에 생을 떠나는 그 끝을

외롭지 않게 지켜주고 싶었기 때문에 엄마가 아프고 언제부터인가 "죽는 순간"에 대해서도 궁금해져서 죽을 때가 되면 인체에 일어나는 변화 같은 것을 찾아보기도 했었다.


하지만 그러한 노력들은 눈에 보이지도 않는 코로나19라는 바이러 스로인 해 물거품이 되어버렸다. 임종뿐이 아니다.

코로나 이전엔 병원 출입이 자유로웠다. 요양병원의 면회시간이 있긴 했지만 정해진 시간에 맞춰가면 이야기도 나눌 수 있고 몸상태는 어떤지, 깨끗한지 등 환자를 살피는 것도 제약이 없었는데 눈에 보이지 않는 이 바이러스는 생각보다 벽도 크고 단단해서 당연했던 병문안조차 허락하지 않았고 죽음의 순간 엄마의 얼굴을 보지도 못하게 했고 마지막 가는 길 손 한번 잡아주지 못하게 했다.


너무나 당연(當然-일의 앞뒤 사정을 놓고 볼 때 마땅히 그러함.)

해서 당연(當然)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당연(當然)하지 않았던 것임을 느끼고 나니 당연(當然)이 당연(戃然-실망하여 의욕을 잃은 모양) 이 되어 나 또한 모든 의욕을 잃어버렸던 것 같다. 그래서 더 마지막까지 함께해주지 못한 것에 대한 미안함으로 마음이 찢어질 것 같이 고통스러웠다.


하지만 후회를 한다고 지나간 순간이 되돌아오지 않는다.

죽은 엄마가 살아 돌아온다고 한다면 후회는 100만 번이고 천만번이고 할 수 있을 거 같은데 결코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으니 아무 소용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인정하고 싶지 않았기에  삐딱한 마음으로 지내다가 문뜩 딸아이를 통해 나의 모습을 볼 때면 엄마도 나를 이렇게 느꼈었는지 생각해본다.

그리고 지금 어떻게 하면 좋을지, 우리 엄마라면 어떻게 했을까 하는 질문을 던져본다.

딸이 화를 내는 상황에서 우리 엄마라면 화를 낼 때 같이 화를 내진 않았을 것이고 어디서 날아오는지도 모를 돌들을 맞을 때면 아무 말 없이 안아주며 그 돌들을 피할 수 있게 보호해줄 것 같다.


새로운 변화를 꿈꾸며 앞으로 나아가는 진취적인 삶도 중요하지만 당연히 함께 할 수 있을 것이라 믿기에 평소엔 신경조차 쓰지 못하는 가족과 함께하는 평범한 일상이 진취적인 삶보다 더 가치가 있다. 세상 그 어떤 것에도 결코 당연한 것은 없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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