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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우현 Aug 15. 2022

전쟁의 시청자들

프롤로그 / 전쟁의 시청자들 #1

전쟁이 일어났다고 합니다. 우크라이나. 여기서는 좀 먼 곳이라죠. '다행히' 이 전쟁이 내 집 문 앞까지 닥쳐올 가능성은 그렇게 많지 않아 보입니다. 너무 말랑한 생각 아니냐고요?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어쨌든 지금의 저는 이 전쟁의 시청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존재입니다.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그저 티브이 앞에 앉아, 또는 인터넷 기사를 보며 침략자들을 비난하고 'pray for'을 sns에 태그 하는 정도겠죠.


아마 누군가는, '시청자'라는 다소 시니컬한 표현에 불편함을 느낄지도 모르겠습니다. 전쟁의 잔혹함을 누구보다 깊이 상상하고 사유하며 피해자들을 위한 공감과 연대를 외쳐온 분들이라면 더욱 그러할 것입니다. 하지만 오해는 말아주시기 바랍니다. '시청자'는 이 글을 읽는 여러분을 지칭하거나 규정하는 단어가 아닙니다. 제겐 여러분을 판단할 자격이나 권위가 없습니다. 누군가를 시청자라 부를 수 있는 기준과 그 실체 또한 명확하지 않죠. 여기서 인정될 수 있는 것이라곤 오직, 앞 문단에서 스스로를 시청자로 지칭했던, 저 자신의 고백뿐입니다. 요컨대 앞으로 이 글에서 말하게 될 시청자 혹은 시청자들이란, 다름 아닌 필자인 저를 모델로 하여 만들어낸 가상 집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물론 이 집단에 들어오실 분들이 계신다면 막지 않겠습니다.)


따라서 이 글, '전쟁의 시청자들'은 지극히 개인적 관점에서 써 내려간, 일종의 시청 후기와도 같은 성격을 띠게 될 것입니다. '이 부분이 좀 불편하던데, 자극적이던데, 이해가 안 되던데, 출연진이 마음에 안 들던데...' 등등. 이런 식의 '지적질'을 해볼 생각인거죠. 뭐 물론 나름의 결론을 내리긴 해야 하기 때문에 '브라운관'이 담아내지 못한 지식과 정보들도 조금은 차용해 볼 것입니다. 그러나 그 수준은 결코 높지 않을 겁니다. 아무리 발버둥쳐 봐야 시청자라는 신분의 '한계'를 넘어설 순 없을테니까요.




시청자들의 근본적이고 숙명적인 한계, 그건 바로 전쟁을 '본다'는 것입니다. 예컨대 아무리 잔혹한 전쟁 영상이라 할지라도 그 충격과 화염이 '브라운관'을 넘어 시청자들의 안방에 전달되진 않습니다. 폭격에 팔다리가 잘리거나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시청자들도 없죠. 그런 시청자이 전쟁 당사자들의 고통을 '완전히' 이해하고 받아들인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운 일입니다.


때문에 대안으로 제기되는 것이 바로 '공감'니다. 매스컴을 통해 전달되는 폭력의 참상과 범죄, 슬픔과 상실의 현장들을 목도하고 '비극적 상상'을 파생시켜 자신에게 이입하는 거죠. 아이러니한 일이지만, 이러한 '공감'을 이끌어내기 위한 기술적 여건들은 현대로 올수록 훌륭해지고 있습니다. 2022년 우크라이나 전쟁은 말할 것도 없죠. 날아온 포탄이 어떤 시설에 명중하는 모습, 다급한 표정으로 달려가는 군인들의 전투행동, 집을 잃은 시민들의 절망스런 목소리까지 보고 들을 수 있습니다. 키워드만 잘 두드린다면 더 구체적인 장면들을 찾아보는 것도 가능하죠.


사례를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크라이나 전쟁 초기, 언론에 집중 조명·보도되었던 한 영상이 있었습니다. 자기 식구들을 안전한 곳으로 피난시키기 위해 이별을 준비하고 슬피 오열하는 우크라이나 남성과 그런 아빠를 위로하며 '가지 말라'고 칭얼대는 딸아이의 모습이 담긴 영상이었죠. 이 영상은 아마도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울렸을 겁니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이 주는 슬픔은 보편적인 이해와 공감이 가능한 감정 영역이기 때문이죠. 무엇보다 이 상황이 잘 짜여진 드라마의 한 장면이 아니라 적나라한 현실이라는 위기감은 '이런 일이 자신에게 벌어질 수도 있다는' 비극적 상상으로 옮겨붙어 시청자들을 자극합니다. 높은 수준의 '공감'이 가능하게 되는 거죠.



이렇게 공감은 시청자라는 '존재의 한계'를 넘어 전쟁에 맞서는 희망이 될 수 있습니다. 자발적이고 주체적인 의지의 표현입니다. 공감의 과정에서 일어나는 '비극적 상상'의 확산 속도는 실제 전쟁이 파급되는 속도를 월등히 능가하여 무차별적 폭력에 제동을 겁니다. 이에 평화학자인 다케나카 치하루는 '고통의 공감' 이 전쟁이라는 "연쇄적인 폭력을 푸는 열쇠"라는 점을 강조하기도 했습니다.



사진 출처: 픽사베이


다만 시청자들의 공감 상태 -슬픔, 동정 등의 감정이 중첩된-는 대개 지속력이 짧습니다. 이는 저 이별의 당사자들, 즉 전쟁의 피해자들이 직접 겪는 고통과 후유증 그리고 상심의 지속력과 감히 비교할 수 없습니다. 당사자들은 고통을 받아들여 고통과 함께 살아가지만 시청자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시청을 통한 고통의 공감 상태는 쉽게 해제되어 버립니다. (어쩌면 때 마침 배달시킨 저녁 식사가 도착했다는 소식에 굴복할지도 모릅니다.)


게다가 '쟁보도'는 시청자들의 공감을 방해하는 요소들로 가득합니다. 편향적이고 자극적입니다. 마치 '재미'를 추구하는 듯 쓰여지는 보도들도 없지 않습니다. 전쟁에 대한 현란한 이론과 고급 정보를 바탕으로 시청자들의 여론을 이끌어가는 전문가의 재도 곤혹스럽습니다. 이들은 시청자들이 보고 싶어 하거나 특히 '꼭 봐야 하는' 것들에 대한 정보들을 제공해준다는 점에서 유익하지만 일정한 선택을 강요하고 감정을 조종하려 든다는 점에서는 강력한 방해자 입니다. 아마 여러분들도 이미 보셨을 겁니다. 국가, 이념, 종교, 민족 등의 갈등이 복잡하게 버무려진 전쟁이라는 현상을 자신들의 논리에 맞게 단순화시켜 시청자들이 혹 할만한 결론을 제공하는 선전가(propagandist)들을 말입니다.


"우리 세계의 특권적 다수에게 지난 150년 동안의 지상전은 최후의 수단으로써 행해지는 구경거리였다. 그래서 우리는 잘 쓴 지적 논평과 그 재미를 추구한다." -존 키건, 『전쟁의 얼굴』, 60쪽


전쟁에 대한 피로감, 다르게 말하면 '망각'도 시청의 또 다른 방해 요소입니다. 이는 시청자라는 집단의 '제삼자적 한계'가 또 다른 모습으로 표출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단기간에 종료되는 전쟁은 많지 않습니다. 보통 수년, 많게는 수십 년 가까이 이어지기도 합니다. 시간이 갈수록 피로는 누적되고, 피로가 누적될수록 시청자들의 공감 능력은 사라져 갑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뚜렷한 '한계'만이 남아있게 됩니다. 재일조선인 학자 서경식은 이를 "진부화라는 폭력"이라고 표현한 바 있습니다.


"전쟁이 진부해진다는 의미가 아니다. 전쟁은 인류 역사와 함께했고, 조금도 진부해지지 않았다. 전쟁의 기억이 진부해지고, 전쟁을 둘러싼 이야기가 좋든 싫든 진부해진다는 의미다. 서둘러 덧붙여 두자면, 나는 이런 진부화를 어쩔 수 없는 것으로 인정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이 “망각에 항거하는” 싸움의 형세가 좋지 못하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서경식, <한겨레>(2022.8.11.)-


우크라이나 전쟁 초기의 분위기들 잘 떠올려 보시기 바랍니다. 한국을 비롯한 세계의 언론이 그야말로 '단일대오'로 입을 모아 침략전쟁의 무도함을 비난하고 책임자들의 처벌을 요구하였습니다. 특히 서방은 인도적 지원과 무기의 공급, 심지어 파병의 가능성까지 언급하며 국가와 민족을 초월한 희생적 봉사와 헌신의 필요성을 강조했죠. 전문가들의 인터뷰와 기고도 쏟아졌습니다. 이 전쟁은 왜 일어났나, 침략을 기획한 주범은 누구이며 의도는 무엇인가, 어떻게 단죄해야 하나, 국제 질서는 어떻게 바뀔 것이며 세계는 어떻게 연대해야 하나. 교훈을 외치는 사람들은 또 얼마나 많았나요. 그러나 잘 아시리라 믿습니다. (지극히 개인적인 느낌이지만) 이런 열기는 채 두 달을 가지 못했습니다.




직히 말해 저 또한 어느 순간부터는, 사실상 감정의 '마비 상태'로 이 전쟁을 시청해왔던 듯합니다. 그저 좀 특별한 국제뉴스로 취급했죠. 물론, 가끔씩은 마음 울컥한 뉴스들 -학살과 폭격, 무고한 어린아이의 죽음 등을 조명하는- 이 전해져 왔습니다만 전쟁에 대한 관심이 전에 비해 식었다는 사실만은 분명히 인정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랬던 건 과연 저뿐이었을까요? 물론, 다른 사람들의 감정은 알 수 없습니다만 요즘(전쟁 시작 170여 일째) 관련 보도들을 보면 이 '마비' 현상이 비단 저에게만 국한되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요즘 우크라이나 전쟁 관련 기사들은 대개 이런 형식입니다.


·'A가 B를 폭격'

·'00명 사망, 00명 부상'

·'B의 비난' + 'B를 응원하는 국가·기구의 규탄 성명'

·'A의 반론 혹은 해명'


참 기계적이죠? 물론, 실제 전장은 절대 기계적일 수 없습니다. 어제 떨어진 폭격과 오늘 떨어진 폭격의 폭력성이 다를 수 없고 어제 죽은 사람들과 오늘 죽은 사람들의 삶을 줄 세울 수 없듯, 당사자들에게는 늘 치열하고 지리멸렬한 나날 들일 겁니다. 결국 달라진 건, 전 세계의 수많은 매스컴을 포함한, 시청자들이라는 말이죠. 특히 이 같은 감정의 '마비 상태'(=공감 등의 대안이 부재한 상태)는 '한계'가 극에 달한 시청자들의 모습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겁니다. 부끄러운 일입니다만 이처럼 '한계가 극에 달한', '마비 상태'의 시청자는 바로 지금 저의 모습과도 일치합니다.


때문에 이 글은 한계 상태를 극복해낸 어느 시청자의 성공 스토리가 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이 글을 일종의 '딴죽 걸기' 정도로 느끼실 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미리 죄송합니다. 굳이 의미를 찾는다면 이런 거겠죠. 제대로 된, 몰입감 있는 시청을 하지 못했던 과거의 나(시청자)를 톺아보는 것? 그리고 미래의 '올바른' 시청자가 되기 위한 전지 작업? 그 결과 어떤 결론에 도달하게 될 지는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대신 위선은 최대한 빼고 말하겠습니다. 그래봤자 저는 일개 시청자일 뿐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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