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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우현 Aug 22. 2022

『고취』 ‘다윗’을 위하여

전쟁의 시청자들 #2

전쟁 시작과 동시에 시청자들은 단출한 조견표 하나를 제공받게 됩니다. 그 조견표에는 곧 (전쟁이라는) '링'에 오를 국가들의 전력이 보기 좋게 망라돼있죠. 다들 한 번쯤은 보셨을 겁니다. 병력/인구, 육해공군 무기체계, 국방비 등을 인포그래픽으로 구현해놓은 편리한 기사들을 말이죠. 이 조견표는 전쟁이라는, 어렵고 복잡한 주제에 대한 진입장벽을 낮추고 단순화시키면서 시청자들을 유인합니다. 아무런 배경지식이 없는 사람들도 전쟁의 우열을 가볍게 점칠 수 있죠.



이번 우크라이나 전쟁에서도 조견표들은 인터넷이라는 여론의 광장을 통해 대대적으로 살포되었습니다. 예컨대, 러시아-우크라이나 양국의 군사력 순위를 전제로 '2위 vs 22위의 대결'로 규정하는 기사들이죠. 조견표는 얼핏, 선악 판단이 개입할 여지가 없는, 단순한 정보 덩어리 같아 보입니다. 시청자들도 별다른 부담을 느끼지 않죠. 이른바 '전쟁의 숫자'가 주는 안락함입니다.


전쟁은 자신의 모든 서사를 숫자로 만들어냅니다. 이를테면 조견표 속 '숫자화 된' 군인들은 한 명의 사람으로, 누군가의 자식으로, 어쩔 수 없이 죽음의 필드에 올라야 할 희생자로 취급받지 못합니다. 그저 무력의 한 기능 요소일 뿐이죠. 반면 '숫자화 된' 무기는 자신의 '살상력'을 감출 수 있습니다. '축구장 00개 크기를 초토화할 수 있는', 바꿔말하면 '축구장 00개 크기' 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한 순간에 살상할 수 있는 잔인성을 은폐할 수 있죠.


시청자들은 전쟁을 하나의 게임처럼 인식할 수 있게 됩니다. 전쟁의 비극 그 자체보다 그것을 계량화한 통계에 초점을 맞추는 거죠. 예컨대 우크라이나에서 '000여 명'이 학살당했다는 사실은 특필하면서도 “총격 사망자 대다수는 팔다리가 몸 뒤쪽으로 묶여 있었다”와 같은 학살의 본질적 참혹함은 부차적으로 취급해버리는 보도들을 이야기해볼 수 있습니다. 시청자들로선 더할 나위없이 만족스럽죠. 굳이 기분을 망쳐가며 자극받을 필요없이 '숫자'만 보면 되니까요.


요컨대 시청자들이 조견표를 집어든 순간부터, 이 같은 '숫자'의 마법 -이를테면 영화 속 잔인한 장면을 '모자이크' 처리하는 것과도 같은- 은 이미 구현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숫자'가 제공하는 이런 안락함들에 취한 시청자들은 마치 몽유병에 걸린 듯 '선택의 광장'으로 걸어들어갑니다. 광장에는 2개의 거대한 부스가 설치되어 있죠시청자들은 이 두 부스 중 한 곳을 택해 입장해야만 합니다. 말하자면 어느 쪽이 선(善)의 진영(다윗)이며, 어느 쪽이 악(惡)의 진영(골리앗)인지를 고르는 선택인 거죠.


그러나 이 선택은 생각보다 쉽지 않습니다. 그 나라들이 결국 전쟁 상태에 이르기까지 거쳐온 갈등의 과정, 역사적 맥락, 국민감정을 조밀하게 파악해야 하기 때문이죠. 필연적 제삼자인 시청자들곧바로 선악을 판단해내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입니다. 따라서 시청자들은 자기 선택의 실패를 최소화시켜줄 두 가지 근거에 의존하게 됩다.


첫 번째 근거는 '정의로운 규정'입니다. 통상 전쟁에는 침공과 방위의 당사자가 존재하기 마련입니다. 요컨대 먼저 무력을 사용한 국가, 즉 침략국 있다는 것이죠. 1974년 UN총회가 결의한 '침략의 정의'는 침략을 정당화할 수 있는 일체의 사유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반면 방위 전쟁, 스스로를 지키는 '자위(自衛)의 전쟁'은 국제연합헌장 51조 등에 비춰 합법적으로 인정됩니다. 뭐, 구태여 국제법을 뒤져보지 않더라도 먼저 가해를 가한 쪽을 째려보는 본능적 경향성은 누구에게나 있을 것입니다.


사진 출처: 픽사 베이

이런 면에서 '정의로운 규정'은 도덕에 가깝습니다. 설령 그 규정이 특정 유력 국가의 주도하에 수립됐다고 하더라도 '불가침'의 정의(義)를 근본적으로 부정할 순 없습니다. 실제, 우크라이나 전쟁의 '서방 책임론'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조차도 침략 행위에 대해서는 대개 비판적 입장을 펼치고 있습니다. 하여 일반적으로, 침략전쟁은 도덕적으로도 국제법적으로도 허용될 수 없는 악(惡)의 성격을, 자위 전쟁은 선(善)의 성격을 띠고 있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두 번째 근거는 시청자 개개인들이 속해 있는 국가, 즉 자국(自國)의 에티튜드입니다. 에티튜드? 네, 에티튜드입니다. '자국의 전략'이라고 말해선 곤란합니다. 일개 시청자가 자기 나라의 국제 전략, 하물며 전쟁이라는 최대의 정치적 난제에 대해 해박한 이해를 가지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시청자는 조심스레 분위기를 살피게 되죠. '우리나라'가 이 전쟁에 우호적인지, 배타적인지 아니면 중립적인지 그런 일종의 뉘앙스들을 빠르게 파악하려고 노력합니다.


시청자의 입장에서 국가는 월등한 양의 정보와 전문지식을 보유한 -자못 정의롭고, 합리적이며, 국익에 부합하는 판단이 가능한- 최고의 '인플루언서'입니다. 국가는 시청자들이 직면한 (선악)'선택의 광장'을 서성거리며 자국의 시청자들이 어느 쪽 부스로 들어가면 좋을지를 은근히 조언합니다. 많은 시청자들이 조언을 따르게 되죠. 조언이라는 간판을 걸었지만 사실 이건 매우 강력한 '유혹'입니다. 이 유혹은 첫 번째 기준 -침략행위에 대한 도덕적 비판-을 가볍게 뛰어넘어 택에 결정적 영향을 미칩니다. 어째서일까요? 저명한 군(軍) 역사학자인 존 키건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벌이는 전쟁은 결코 국가 범주를 크게 벗어나지 못한다." -존 키건, 『전쟁의 얼굴』, 60쪽


이 말은 국가(자국)에 종속될 수밖에 없는, 시청자들의 약점을 언명하고 있습니다. 이 약점은 시청자들이 언제든 그 지위를 박탈당하고 '전쟁의 당사자'로 전락할 수 있다는 불안으로부터 출발합니다. 편안한 시청자와 달리, 전쟁의 당사자들은 그것이 (좋든 싫든) 자국의 깃발을 추종해야 합니다. 물론 자국의 전쟁에 대해서도 반전(戰)을 주장할 수 있고 실제로도 그런 사례들이 적지 않지만 그것은 강력한 탄압, 극단적으로는 자신이 '부역자'로 규정될지도 모를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는 측면에서 커다란 제약이 존재합니다. 그 강력한 제약은 마치 '양치기 개'처럼, 광장의 시청자들을 몰아갑니다.


사진 출처: 픽사베이




물론, 모든 시청자들이 똑같진 않습니다. 특히, 자신의 판단과 도덕적 지향을 강하게 신뢰하며 나아가 강철 같은 의지를 가진 사람들은 제 아무리 '양치기 개'들이 설친다 해도 그 몰이에 끌려가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의 이해 목표는 그런 '강심장'을 가진 사람들의 심성이 아닙니다. 어떻게든 오래 살고 싶고, 재산을 웬만큼 불리고 싶어 하며, 내 손해를 감수하면서까지 무언가와 충돌하는 상황은 피하려는 사람입니다. 아울러 남을 배려하고자 하는 기본적 도덕심은 가지고 있지만 성직자적 희생과 봉사에까지는 이르지 못하는 '그런 사람들'이죠.


참고가 될만한 사례를 한번 거론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1944) 23살의 일본 청년이었던 야마다 후타로(山田風太郞)라는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자신의 조국 일본이 세계를 상대로 한, 거대한 전쟁에 나서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야마다는 자신의 일기에 이런 내용을 적었습니다.


“아시아에 있으면서 우리가 만나는 아시아인은 모두 빈곤의 극도에 처해있는 것은 일본의 치욕이다. 그것을 구하는 것은 일본의 의무이자 책임이 아니면 안 된다...(그러나 나는 일본이) 조선과 대만을 식민지로서 두면서 아시아 해방을 외치는 독선의 대모순을 안고 있는 것은 잘 알고 있다” -小神野真弘, 아시아 사람들이 바라본 태평양전쟁』281쪽-


'아시아의 해방을 위해'라는 표어는 태평양전쟁에서 일본이 내건 대표적인 명분이었습니다. 야마다는 그 말을 신뢰하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가 조선과 대만을 식민지로 두고 있는 자기 조국의 '대모순' 또한 함께 느끼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야마다의 '대모순'은 우리 같은 '그런 사람'들에게 많은 시사점을 줍니다. 그는 대체 왜 모순을 느꼈을까요? 일본이 오래전부터 조선과 대만을 식민 지배해왔다는 사실과 자신의 '정의(신념)'가 충돌하고 있었던 게 아닐까요?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야마다는 자신이 '시청자'였던 시절(일본이 전쟁을 시작하기 전)부터 국가라는 '양치기 개'의 몰이에 따라 온전한 자기 선택을 하지 못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야마다가 느낀 '대모순'이야말로 그 증거라 할 수 있죠.


사진 출처: 픽사 베이

물론 선악의 구도가 확실한 전쟁은 이런 고민의 여지가 많지 않을 겁니다. 나치, 파시즘, 군국주의라는 '악'의 형태가 뚜렷했던 제2차 세계대전이 그랬었죠. 이번 우크라이나 전쟁도, 제2차 세계대전만큼은 아니지만, 선악의 구도가 제법 분명해 보입니다. 세계의 많은 시청자들이 우크라이나를 다윗으로, 러시아를 골리앗으로 선택했습니다. 저 또한 그렇습니다. 이 판단은 아마 옳을 겁니다. 실제로, 2022년 3월 2일 유엔총회에서 채택된 러시아 침공 규탄 결의안은 141개 회원국이 찬성표를 던졌습니다. 압도적인 결과죠.


하지만 모두가 같은 선택을 하지는 않은 듯합니다. 러시아 규탄에 반대하거나(5개국), 기권표를 던진(35개국) 40개 국가가 있다는 사실 또한 간과해서는 안됩니다. 우크라이나를 지지하는 나라와 러시아를 지지하는 나라의 시청자들 중, '양치기 개'의 몰이에 좀 더 강하게 휘둘린 쪽은 어디일까요? '이쪽'일까요? '저쪽'일까요? 저는 저쪽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만, 아직 속단할 순 없습니다. 이야기를 좀 더 진행시켜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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