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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우현 Aug 29. 2022

『우월』 우리가 ‘도덕’이다

전쟁의 시청자들 #3

이제 시청자들은 '정의로운 규정'에 따라, '자국의 에티튜드'에 부합하는 선택의 부스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광장은 순식간에 텅텅 비워졌고 부스 안은 많은 사람들이 북적거리고 있습니다. 물론 구속은 없습니다. 시청자들은 자신이 원한다면 언제든지 부스 밖 광장으로 나갈 수 있습니다. 앗! 마침 저기 몇몇 시청자들이 광장 밖으로 나가려는 것 같군요. 뭐 나쁠 것 없죠. 생각할 자유는 누구에게나 있는 거니까요. 그런데 실랑이가 좀 있는 것 같습니다.


"뭐? 부스 밖으로 나가겠다고? 당신, '하일 히틀러'를 외칠 작정인가?"


어디선가 내려 꽂히는 묵직하고 날카로운 경고. 『전쟁의 기술』의 저자 로버트 그린은 날카로운 목소리의 주인공들을 '도덕적 전사'라고 불렀습니다. "도덕성을 무기로 사람들의 관심을 집중시키고 대의에 대한 죄책감을 이용,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들을 사악하고 매정하게 비치도록 만드는" 사람들이죠. 하물며 이처럼 '히틀러 추종자'의 낙인까지 자유롭게 휘두르는 상황이라면 더 말할 것도 없을 겁니다. '히틀러', '나치'는 거의 모든 인류가 비판해 마지않는 극악(惡)의 상징이라는 점에서 참으로 편리한 선전 소재니까요.


이미 우리는 이 같은 비유들이 적국을 비난하기 위한 혹은 반대로 우군을 결집시키기 위한 프로파간다(propaganda) 수단으로 활용되는 현상을 종종 목격해왔습니다. 사담 후세인(이라크), 아사드(시리아), 카다피(리비아) 등의 독재자는 말할 것도 없고 이른바 '자유진영'을 대표하는 미국의 대통령들(조지 부시와 도널드 트럼프)조차도 한때 히틀러에 비유되며 곤혹을 치른 바 있습니다. 일종의 '악마화' 전략입니다.




번 우크라이나 전쟁에서의 '히틀러'는 단연 푸틴니다. 근거는 충분합니다. '히틀러의 비유'로도 모자랄 만큼 악랄한 전쟁 범죄들이 그의 책임 하에 자행되었습니다. 2022년 4월, 부차(Bucha) 등 키이우 인근 소도시에서 벌어진 '대학살'이 대표적인 사례죠. 퇴각하는 러시아군들에 의해 수백여 명의 우크라이나 민간인들이 희생되었습니다. 부차의 대형교회 앞마당에서만 150~300명이 묻혔을 거라 추정되는 14m 규모의 구덩이가 발견됐죠. 안드리 네비토우 키이우 경찰청장은 키이우 일대에서 900구가 넘는 민간인 주검이 발견되었으며 사망자의 대부분(95%)이 총상으로 숨졌다고 발표한 바 있습니다. 희생자의 규모는 조사과정에서 갈수록 늘어갈 것입니다. 뿐만이 아닙니다. 집속탄, 소이탄 국제적으로 사용을 제한하는 대량살상·화학무기들을 러시아군이 사용했다는 증거들 또한 심심찮게 발견됩니다.



이런 잔혹한 전쟁범죄들은 도덕적 전사들의 '악마화' 전략에 강력한 힘을 불어넣어줍니다. 특히 민간인을 대상으로 한 범죄들은 비판받아 마땅하다는 점에서 시청자들의 압도적인 동의를 얻어낼 수 있죠증거 또한 너무나도 분명합니다. 때문에 시청자들은 도덕적 전사들의 악마화 전략이 다소 지나치더라도 또는 그 강도가 더욱 세지더라도 큰 문제를 제기하지 않습니다.


신이 난 전사들은 더욱 큰 목소리로 시청자들을 향해 소리칩니다. '분노하라, 분노하라, 더욱 분노하라' 이들은 부스 안의 모시청자들이 악마화 전략에 동참해주길 바라고 있습니다. '심심한', '애매한' 동조에는 썩 만족하지 못합니다. 반대는 말할 것도 없죠. 시청자들은 점점 부담스러워집니다. 물론 여기에서의 '부담'이란 인류의 보편적 가치들 -침략 반대, 인권 수호, 질서 유지 등-을 부정하려는 심성이 아닙니다. 생각할 자유, 상상과 사유의 자유 박탈당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일 따름이죠. 전사들이 조금의 이견도 허락하려 들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러시아의 침략을 강하게 비판한다는 측면에서 '이쪽 부스'에 들어와 있으나 지나친 악마화 전략에는 유보적 입장을 표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푸틴을 악마화하는 미국의 태도가 '전쟁을 외교적으로 끝낼 수 있는 탈출구를 닫아버리고 있다'(노엄 촘스키), '우크라이나 전쟁의 의미와 복잡성을 축소시키고 있다'(리처드 포크)는 류의 주장들입니다. 한발 더 나아가 대놓고 '서방 책임론'을 주창했던 존 미어 샤이머(John Joseph Mearsheimer) 같은 국제정치학자들도 존재하죠.


도덕적 전사들은 이러한 이견들을 일종의 '반동'으로 취급해버립니다. 그리고 분노하죠. '어찌 악마의 편에 설 수 있느냐! (= 당신, 하일 히틀러를 외칠 작정인가?)' 반동들을 몰아붙이는 전사들의 압박은 실로 무시무시합니다. 반동이 되어버린 시청자들은, 미국의 교육학자 헨리 지루(Henry A. Giroux)의 지적대로, "조롱을 받거나 무시되거나 최악의 경우 반역적이라는" 취급을 받는 지경까지 몰아붙여집니다.


"적을 사악한 존재로, 이단으로 보고 있다면 상대를 절멸시켜야 전쟁이 끝나기 때문이다. 또한 도덕성의 전쟁통제가 불가능한 감정의 물결을 일으킨다." -로버트 그린, 『전쟁의 기술』, 478쪽


'절멸'. 그렇습니다. 이것이야말로 도덕적 전사들의 최종 목표입니다. 그들은 적과 그리고 그를 추종하는 반동들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멈추지 않습니다. 이곳(선택의 광장과 부스)은 이미 도덕적 전사들이 활개 치는 또 다른 전쟁에 돌입해 있는 것입니다. 이 전쟁은 비록 피와 살이 튀고 죽음이 난무하는 총칼의 전쟁과는 다르지만 -다른 의견을 적대시하고 비난이라는 포격을 퍼부어 완전히 입을 다물게 하는- '절멸'을 목표로 한다는 점에서 분명 전쟁의 성격을 띠고 있습니다.

사진 출처: 픽사베이


그러나 안타깝게도 시청자들 자신이 전쟁의 한 복판에 있다는 사실눈치채지 못합니다. 설령 눈치챘다고 해도 이미 늦었습니다. 사실 이 '도덕성의 전쟁'은 시청자들이 '조견표'를 받아 든 순간, 또는 다윗과 골리앗을 정했을 때부터 시작되고 있었던 것니까요.


도덕적 전사들의 압박은 시청자들을 갈수록 움츠러들게 합니다. 판단력이 흐려진 시청자들은 결국 '광장 밖으로 나가보려는' 시도를 포기합니다. 그 시도의 이면에 '저쪽 부스로 넘어가겠다'는 '전향'의 의도가 없다 하더라도 자신의 돌출적 행동이 전사들을 자극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도덕적 전사들 입장에선 기다려 마지않았던 순간입니다. 전사들은 무기력하게 부스를 배회하고 있는 시청자들에게 다가가 손을 내밉니다. '당신, 우리와 함께 하지 않겠나.', '도덕적 전사가 되지 않겠나.' 이에 결국 많은 시청자들이 도덕적 전사가 되는 길을 택합니다. 전사들이 내민 손을 붙잡으면서 속으론 끊임없이 이런 주문을 되뇌고 있죠.


'사실 그들의 말이 틀린 것도 없지 않은가? 어쩌면 전사들과 함께 하는 것이야 말로 진정한 평화의 길일 것이다.'




도덕적 전사가 되는 길을 택한 시청자들은 그동안 자신을 괴롭혔던 각종 압박들에서 탈출할 수 있습니다. 더 이상 부스 안을 배회할 필요도 없습니다. 고민과 망설임은 한순간에 사라졌고 주위는 어깨를 맞댈 수 있는 든든한 동료들로 북적거립니다. 뿐만이 아닙니다. 끊임없이 재생산되는 상대방에 대한 비난과 악마화 낙인-전쟁범죄자, 제국주의자, 테러리스트, 살인자, 제노사이드 등- 은 도덕적 전사들의 사기를 북돋아 심리적 기반을 유지시켜줍니다.


'여러분 도덕적 전사가 되십시오. 이제 저는 편안합니다.' 아마 어떤 시청자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글쎄요. 만약 누군가가 그 길을 선택하겠다면 저는 만류하고 싶습니다. 도덕적 전사라는 존재가 권위적이고 강압적이라서, 그래서 대놓고 지지하기엔 뭔가 좀 불편하기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닙니다. 전사의 길이 그렇게 생각만큼 쉽지만은 않기 때문입니다. 물론 처음에는 편안해지겠죠. 그러나 그들은 곧 '부스 안의 반동들'보다 몇 배는 어렵고 거대한 적과 싸워야 합니다. 바로 '위선'이라는 이름의 적입니다.


"일단 적을 상상하면 이미 인간은 전쟁 상황에 빠진 것이다. 그 적에 이름을 붙이는 순간, 전쟁을 선포한 것이나 마찬가지인데 사실상 선전포고는 단지 형식일 뿐 아무런 의미가 없다. 가령 이라크 전쟁은 이라크 침략 전에 시작되었던 것이다. 즉 이라크가 악의 축으로 지명되었을 때 시작된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제임스 힐먼 『전쟁에 대한 끔찍한 사랑』, 4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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