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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우현 Sep 05. 2022

『분노』 위선의 가면을 벗겨라

전쟁의 시청자들 #4

위선(僞善). 그리 어려운 단어는 아닙니다. 거짓 '위(僞)'에 착할 '선(善)', 거짓된 착함. 단순하게 해석하자면 그렇죠. <표준국어대사전>에 나와있는 정의는 한층 더 철학적입니다.


"겉으로만 착한 체함. 또는 그런 짓이나 ."


중요한 의역 포인트가 등장합니다. 바로 '겉'이라는 개념이죠. 안(內)이 있으면 밖(外)이 존재할 수밖에 없듯 '겉' 또한 '속'을 반드시 동반합니다. 대중의 지지와 환호를 등에 업는 '겉'과 달리 '속'은 고요하고 수동적입니다. 둘은 진정성을 기준으로 굳게 이어지거나 단절되며 '겉'이 화려하면 화려할수록 그 단절의 정도는 강해집니다. 다만 '속'은 쉽게 자신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그저 어둠 속에서 암약하며 '겉'을 조소할 뿐이죠.


특히 전쟁은 온갖 '겉'들이 폭주하는 '위선의 직판장'입니다. 이 직판장에서는 전쟁의 승패에 이해관계가 걸려 있는 수많은 관계자들의 위선이 실시간으로 경매되고 있습니다. 시청자 이 직판장의 소비자고 봐도 무방합니다.


직판장엔 올라오는 매물들은 두 종류로 나뉩니다. '저쪽'(敵)의 위선과 '이쪽'(我)의 위선죠. 뭘 살지는 시청자의 자유입니다. 하지만 통은 우리 쪽의 위선보다 대방의 위선을 다룬 상품을 선호하죠. 때문에 시청자들의 장바구니는 공격적이고 호전적인 언어들로 채워지게 됩니다. 마치 무기를 비축하듯 말이죠.


그렇다면 우크라이나 전쟁의 직판장은 어떨까요.




다시 한번 강조드리지만 저는 '이쪽' 편에서 러시아를 째려봐왔습니다. 쟁이 시작되자마자 직판장으로 달려갔던 사람들 중 하나죠. 사실 그럴 수밖에 없었습니다. 전쟁의 배경이야 어쨌든 러시아는 침략국니까요. 근본적으로 전쟁의 명분이 궁색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개전 초기 러시아가 내건 전쟁의 명분 러했습니다.


ⓐ 우리의 목표는 우크라이나 점령이 아니다. 이것은 특별군사작전일 뿐이다 = 우리는 침략자가 아니다.

ⓑ 러시아는 자위권을 행사했을 뿐이다 = 우리도 어쩔 수 없는 피해자다.

ⓒ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의 '탈나치화(De-Nazification)'를 추구한다 = 적은 악마다.

사진 출처: 픽사베이


'뭐라고?!'


직판장은 러시아의 위선을 폭로하는 상품들로 빠르게 채워지기 시작했습니다. 개전 직후는 시청자의 구매욕이 가장 충천하는 시기라고 볼 수 있죠. 시청자들은 상품을 구매함으로써 위선을 극복할 수 있는 지식과 감정을 습득하게 됩니다. 여기서 '지식'이란 위선의 증거, '감정'이란 일종의 투쟁심이죠. 시청자들은 이 두 가지를 잘 버무림으로써 어느 정도 정리된 자기주장들을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예컨대 이런 식이죠.


About ⓐ
"러시아는 전쟁 발발 후 133일 동안 하루도 빼놓지 않고, '우크라이나 영토 확보에 대한' 브리핑을 실시했다. 그리고 그것은 다분히 환희에 찬 선언이었다."

"러시아 외무장관은 “미래에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국민이 함께 살게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우크라이나 국민 입장에선 정말 끔찍한 협박 아닌가?"

"점령지역을 중심으로 벌어지는 우크라이나어의 말살, 이른바 '랭귀사이드'(Language+cide)는 러시아의 위선을 가장 확실하게 증명하고 있다. 우크라이나 민족의 정체성을 약화시키고 나아가 러시아의 완전한 지배를 완성하겠다는 의도가 아닌가?"
About ⓑ
"도대체 어딜 봐서 '자위의 전쟁'이라는 건가? 8월 21일 현재, 전쟁으로 사망한 우크라이나 민간인은 5,587명, 부상자는 7,890명에 이른다는 유엔 인권고등판무관 사무소의 발표가 있었다. 도심 주거지역은 물론, 쇼핑몰, 기차역 등에서도 민간인에 대한 무차별적 학살과 공격이 자행되고 있다."

"지난 4월 8일, 크라마토르스크 기차역에서는 러시아군의 탄도 미사일 공격으로 피난민 50여 명이 숨지고 300여 명이 다쳤다. 대량살상무기의 하나인 집속탄*도 사용된 것으로 알려졌다. 게다가 끔찍하게도, 발견된 미사일 잔해에는 "어린이를 위하여"라는 문구가 러시아어로 적혀 있었다. 자, 피해자는 누구인가? 답해보라." (*집속탄(集束彈): 수백 개의 꼬마 폭탄이 내장된 미사일로 광범위한 지역을 초토화할 수 있다.)
About ⓒ
"우크라이나가 나치 세력의 소굴이라고? 물론, 일부 극우적인 세력들이 우크라이나에 존재했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들이 "결코 우크라이나인 대다수를 대변한 적이 없었다"는 롭 퍼거슨(Rob ferguson)의 지적을 먼저 새겨들어라."

"무엇보다 러시아는 전쟁의 명분이 될 만큼 '거대한' 나치 세력의 실체를 찾아내지 못하고 있다. 보아라. 무고한 우크라이나 주민들을 겁박하며 마을 주민 중 '나치'와 '파시스트'를 지목하라며 총구를 들이대고 있지 않은가?"


그럴듯하죠? 물론 이러한 주장은 연구·분석, 고민 끝에 도출된 전문가의 의견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무엇보다 이 주장들이 근거로 하고 있는 '지식'들은, 누군가(특히 언론)를 통해 일방적으로 제공받은 '껍데기 지식'일뿐이죠. 하지만 뭐라 하진 말아주시기 바랍니다. 시청자는 존재론적으로 이러한 '껍데기 지식'을 이용하고 향유하는 사람들입니다. 정보가 극도로 제한되는 전쟁은 더욱 그렇죠. 시청자가 왜 시청자(者)이겠습니까.


그렇다면 '감정'은 어떨까요? 감정은 지식과 달리 제법 주체적입니다. 감정을 일으키는 주체는 언제까지나 시청자 본인이니까요. 감정없이, 지식 그 자체로는 위선을 극복하려는 시도가 성립하기 어렵습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앞 문장들의 진정한 본질 또한 그 속에 내재된 '감정'에 있습니다. 위선을 이야기함으로써 감정, 즉 분노를 표출하게 되는 것이죠.


위선의 언급과 분노의 발생은 동시적입니다. 러시아의 위선에 대한 증거들을 죽 나열하고 나서 순차적으로 분노를 일으키는 구조가 아니라는 거죠위선과 분노의 상관관계는 마치 동면의 앞뒷면과도 같습니다. 이상하게 생각할 일은 아닙니다. 원래 위선이란 게 그렇습니다. '폭력을 행사하게 하는 주된 근거'가 될 정도로 강력한 분노를 야기하는 것. 한나 아렌트의 말입니다.


"...참여자(engage)를 분노자(enrage)로 전환시키기 쉬운 원인들을 역사적으로 탐구한다면, 그 으뜸 원인은 불의가 아니라 위선(hypocrisy)이다... 적의 얼굴에서 위선의 가면을 벗겨내는 것, 폭력 수단을 사용하지 않아도 지배를 가능하게 해 주는 적의 사악한 음모와 조작을 폭로하는 것, 다시 말해서, 진실이 드러날 수 있도록 절멸의 위험조차 무릅쓰고 행동을 촉구하는 것, 이것이 지금도 교정과 거리에서 오늘날의 폭력이 나타나는 가장 강력한 동기들 중의 하나이다. 게다가 이러한 폭력은 비합리적인 것이 아니다.-한나 아렌트, 『폭력의 세기』, 102~104쪽-

사진 출처: 위키백과

분노를 무조건 부정적으로만 바라볼 필요는 없을듯 합니다. 특히 위선에 대한 분노는, 아렌트의 말처럼 "비합리적인 것이 아니"니까요. 또 "진실이 드러날 수 있도록" 행동하는 용기가 되어 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아렌트는 경고의 말도 덧붙였습니다. "위선에 대항하는 그러한 폭력적인 반응은 아무리 자신의 용어법으로 정당화할 수 있을 지라도, 특정한 목표를 갖고 자신만의 전략을 발전시키려고 한다면 그 존재 이유를 상실한다."




물론 위선에 대한 분노는 이쪽 만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반대의 경우도 존재하죠. '저쪽'의 시청자들은 '이쪽'의 위선에 분노를 느낄 것입니다. 요컨대 서로서로, 상대방(敵)의 위선을 '분노'라는 감정으로 대응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을 제시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상대방의 위선은 그렇다 치고 우리 편의 위선은?


사실 문제는 여기 있는 것 같습니다. '이쪽', 즉 우리 편의 위선 말입니다. 시청자들은 여기에서도 '정상적으로' 분노를 표출할 수 있을까요? 글쎄요. 직판장에 우리 편의 위선이 올라와도 쉬쉬하고 외면하려 하진 않을까요? 왠지 이 상품을 슬쩍 보기만 해도 '도덕적 전사'가 벼락같이 나타나 호통을 칠 것 같단 말이죠.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화·를 내·겠·습·니·까... 어라 잠깐?'


어쩌면 바로 여기, 우리의 감정 마비 상태를 설명해줄 정답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범죄, 특히 적의 범죄일 때는 우리는 극도로 분노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 자신의 범죄일 때는 분노를 다스리기도 하고 부인할 수도 있습니다. 이 방식은 100% 정확하게 작동합니다.” -노엄 촘스키(2009.7.23.), 『학살의 정치학』, 4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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