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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우현 Sep 13. 2022

『불편』 ‘쉿’ 침묵은 금이다.

전쟁의 시청자들 #5

2022년 2월 21일 우크라이나 전쟁이 '초읽기'에 들어간 그날 저녁, 러시아 국영방송에 푸틴 대통령이 출연했습니다. 대국민 연설이라는 말로 포장되었지만 우크라이나 침공의 의지와 명분을 담은 사실상의 선전포고였죠. 장장 55분에 걸쳐 이어진 이날 연설에서 푸틴은 자신의 제국주의 역사관, 소위 유라시아주의라고도 불리는 사상(이론)을 적나라하게 드러냈습니다. 우크라이나는 '역사적 러시아의 일부'혈통을 포함한 역사, 문화, 정신 등에서 러시아와 밀접히 연결돼 있으며 국가로서의 정체성 또한 결여된 '미국의 식민지'라고 절하했죠.



푸틴의 이 발 대해 많은 전문가들이 비판의 목소리를 쏟아냈습니다. 각종 지정학 이론은 물론, 과거 푸틴이 작성했던 논문과 '알렉산드로 두긴' 등 푸틴에게 영향을 주었던 사상가들 거론하며 역사관의 왜곡을 지적했죠. 모두 참고할만한 주장들이었습니다만 개인적으로는 아프리카 케냐의 유엔대사인 마틴 키마니의 반박이 인상 깊었습니다. 그는 민족, 인종, 종교적으로 동질성이 있는 아프리카의 여러 국가 또한 '국경'이 갈려있지만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피하기 위해 인내하고 있음을 토로했습니다. 역사적·민족적 유사성 등을 매개로 전쟁을 정당화하려는 러시아의 의도를 직격 했던 거죠.


마틴 대사의 발언은 큰 화제가 되었습니다. 사실상 역사의 피해자라고도 할 수 있는 아프리카에서 이런 '미래지향적인'(우리는 인내로서 과거를 극복해왔고 앞으로도 인내할 것이다) 말이 나왔으니 박수를 칠 수밖에요. 지난날 아프리카를 식민 지배했던 유럽 국가들이 특히나 좋아했을 겁니다. 국내에서도 꽤나 많은 주목을 받았었죠. '케냐 대사 멋져!'


지만 마냥 감동만 받을 일은 닙니. 케냐 대사의 말이 어딘가 잘못됐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대사의 말은 얼핏 러시아만을 강하게 비판하고 있는 것으로만 보입니다만 자세히 뜯어보면 서방, 특히 과거 유럽의 제국주의 악행도 동시에 비판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그는 이렇게도 꼬집었습니다.


“지금의 상황은 케냐의 역사를 상기시킵니다. 케냐와 대부분의 아프리카 국가들은 제국의 종식과 함께 탄생했습니다. 우리의 국경은 우리가 직접 그린 것이 아니었습니다. 우리의 국경은 런던, 파리, 리스본 등 저 멀리 떨어진 식민주의 메트로폴리스에서 만들어졌습니다. 그들이 갈라놓은 고대의 민족은 전혀 고려되지 못한 채였습니다."


'러시아는 나빠. 렇다고 너희가 착하다 말하지 않았어.쉽게 말하자면 이런 거겠죠. 시청자들은 묵연해집니다. 여기엔 아주 살짝, 불편한 감정도 숨겨져 있죠. 저는 새삼 자를 대고 그린 듯 부자연스러운 아프리카의 국경선이 머릿속에 떠올렸습니다. 1884년 베를린에 모인 유럽 열강들이 아프리카 식민지 분할을 결정할 때(베를린 회의), 거기 모였던 국가들이 말이죠. 독일, 영국, 프랑스, 러시아, 미국, 스페인, 포르투갈, 벨기에, 네덜란드, 덴마크, 스웨덴, 터키...

사진 출처: 픽사베이

몇몇 시청자들스윽 유럽을 바라봅니다. 유럽의 (러시아를 향한) '분노'와 (아프리카를 향한) '웃음' 속에서 '위선인 듯 위선 아닌 위선 같은' 묘한 불편감을 느끼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물론 대다수 시청자들은 그냥 흘려듣고자 합니다. ①이미 지나가버린 일이기도 하거니와, ②우리도 '적당히' 반성하고 있고 무엇보다 ③피해 당사자가 괜찮다고도 했으니 ④묻고 넘어가도 상관없지 않으냐. 아니 그보다 지금은 힘을 합쳐 러시아의 침략을 비판해야 하니까. ⑥복잡한 식민주의 같은 건 나중에 역사책으로 배우란 말이지... 그런데 이상하네요. 저는 왜 여러분께 이 보잘것없는 해프닝을 구구절절 전하고 있을까요?




그때 한 시자가 저를 위로했습니다. 과거보단 미래를 보자며 격려했죠. 그는 내게 말했습니다. 과거를 따지고 드는 것은 비생산적인 일이라고, 전쟁이 일어나기 전이라면 모를까 이미 일어나버린 전쟁을 '역사책'으로 막을 순 없지 않냐. 일견 타당한 말입니다. 가상의 '눈가리개' 같은 것을 만들어서 우리 편의 부끄러운 과거사, 전쟁 책임, 범죄와 일시적인 단절을 꾀하는 것도 한 방법이겠죠. 또 다른 시청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옛날 일 말하자면 끝도 없다.'


하지만 이 같은 노력은 금세 수포로 돌아가버렸습니다. 왜냐고요? 과거야 '묻지 않겠다' 치더라도 시도 때도 없이 툭툭 불거져 나오는 위선적 언행까진 어떻게 할 수 없었기 때문이죠. 위선은 그 실체가 폭로되기 전까진 선함(善)과 정의로움으로 무장하고 있습니다. 시청자들로선 판별이 어렵죠. 팥으로 메주를 쑨대도 일단 믿을 수밖에요. 따라서 시청자들은 '눈가리개'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눈앞에 나타나는 예기치 못한 위선, 특히 우리 편의 모순된 언행들을 목격하고 적잖이 당황하게 됩니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시작된 지 3개월 여 가 지난 시점에서 터져 나온 조지 W.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의 말실수가 그런 사례입니다. 그는 미 텍사스 주에서 열린 한 행사 연설에서 "한 사람의 결정으로 정당하지 않고 잔혹한 '이라크' 침공이 개시됐다"라고 발언했습니다. 엥 이라크? 당황한 부시는 곧바로 머리를 휘저으며 이라크가 아닌 '우크라이나'를 말하려 한 것이라고 정정합니다. 그리고선 조용하게 속삭였죠. "이라크도 마찬가지죠. 어쨌든" 좌중에서는 웃음이 터져 나왔습니다.



'이건 그냥 단순한 말실수 아닌가?' 네. 동의합니다. 설마 하니 부시가 이제 와서 자신의 '인생을 부정'했을까요. "부시가 자신의 속내를 고백하기까지 20년이 걸렸다"라고 비꼬았던 칼럼니스트도 있었습니다만 별다른 의도가 있어 보이진 않습니다. 그냥 그러려니 넘겨도 될 사소한 사건이죠. 문제는 (저처럼) 예민하고 소심한 시청자들입니다.


사실 저는  불편했습니다. 부시의 실수 때문에? 아니오. 전혀 다른 부분니다. 바로 청중들의 '웃음(와하하)'입니다.


'이게 웃을 일인가?' 이 불쾌감은 분명 위선을 목격한 데서 기인하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자기도 모르게 터져 나오는 웃음을 막긴 어려웠을 겁니다. 하지만 그 전쟁은 그렇게 웃고 넘길 만큼 가볍진 않단 말이죠. 이라크를 전쟁의 도마 위에 올려놓은 미국의 말실수. 그리고 '유쾌한 웃음들'...


같은 맥락에서 이건 어떻습니까? 한국을 전쟁(식민지)의 도마 위에 올린 일본의 말실수. 그리고 유쾌한 웃음들(와하하). 폴란드를 전쟁의 도마 위에 올려놓은 독일의 말실수. 그리고 유쾌한 웃음들(와하하). 우크라이나를 전쟁의 도마 위에 올려놓은 러시아의 말실수. 그리고 유쾌한 웃음들(와하하)...


2003년 조지 부시 대통령은 이라크가 대량살상무기(WMD)를 가지고 있다며 침공을 강행했다.

그러나 정작 대량살상무기는 "이라크 땅이 아닌 부시 행정부의 마음속에"(정욱식) 있었다.

세계적 반대 여론도 높았던 전쟁이었다. 실제로 유엔 안보리의 승인이 없었다.

사람? '많은 사람'이 죽었다. 정확한 수치를 잘 모르기에 더 참혹하다.

'참고로' 미 브라운대 왓슨국제문제연구소는 13만여 명의 이라크 민간인이 사망했다고 분석했다.

'참고로' 미군이 관리했던 이라크 아부 그라이브 교도소에서는 끔찍한 학대와 고문이 이루어졌다.

'참고로' 이라크 팔루자에서는 미군에 의한 초토화 작전이 이루어져 민간인 수백 명이 사망했다.


아참, 그리고 여기에는 잊지 말아야 할 또 하나의 치명적인 위선이 숨겨져 있습니다. 사실 저는 이라크 전쟁 당시 세계에서 세 번째로 많은 규모의 군대를 파병했던, 한국의 청자입니다. 아, 그래도 한국은 비전투원 파병이었다고요? 예, 예. 아무렴요.

사진 출처: 픽사베이




'이쪽' 부스에서 저같이 예민한 -별것 아닌 위선에도 놀라고 당황하는- 시청자들은 아마도 '고문관' 같은 존재일 겁니다. 겁이 많아 돌격도 못하고 목소리도 작으며 조금만 아파도 꾀병을 부리는 그런 못난 사람들이죠. 실제로 패튼(Patton) 장군은 이런 병사들을 병적으로 싫어했다고 합니다. 그는 전투에 지쳐버린 또는 전쟁 신경증에 걸린 병사들을 전투에 내몰기 위해 지독한 독전()* 지휘를 발동했죠. 패튼은 전투의 공포에 질려 울고 있는 병사들에게 욕설을 퍼붓고 구타했습니다.


"빌어먹을 소심한 녀석 같으니라고. 자넨 염병할 겁쟁이에, 노란둥이 개새끼에 불과해. 전선으로 돌아가서 다시 싸우도록 해!"


공교롭지만 여기, 시청자들의 부스에도 훌륭한 독전 지휘관이 있습니다. 바로 미국(USA)이란 이름의 지휘관입니다.


*독전: 싸움을 감독하고 사기를 북돋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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