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최우현 Sep 23. 2022

『회피』 미워도 다시 한 번

전쟁의 시청자들 #7

시청자들은 자신의 조국을 사랑합니다. 이 사랑은 연인 관계에서 발생하는 성적인 느낌의 사랑, 요컨대 낯 뜨겁고 민망한 고백으로는 표출되곤 하는 열정과는 결이 좀 다릅니다. 잠재돼 있죠. 평소에는 자신이 국가를 사랑하는지에 대한 인식조차 하기 어렵습니다. 무의식의 영역에 가깝달까요.


전쟁은 이 잠재된 사랑의 본질을 드러내는 훌륭한 데이트 장소입니다. 자국의 전쟁이라면 말할 것도 없지만 타국의 전쟁도 예외는 아니죠. '우리나라'와 물리적, 정신적 거리가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위기의 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입니다. 위기의 가능성에 빠진 국가는 시청자들의 사랑을 요청합니다. 시청자들은 기꺼이 거기에 응하죠. 이는 마치 어머니의 사랑과도 같습니다.


비유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사업에 실패해 빚에 쫓겨 고향으로 도망쳐온 한 남자가 있었습니다. 고향에서는 어머니가 홀로 어렵게 살림을 돌보고 있죠. 어머니는 이제사 찾아온 아들이 미웠습니다. 아들은, 집에서도 미운 짓만 골라하던 게다가 틈만 나면 돈을 요구하던, 그야말로 '탕아(蕩兒)'으니까요. 하지만 그럼에도 어머니는 아들을 위해 안방을 비웠습니다. 깨끗한 옷을 내어주고 따뜻한 국밥을 대접했죠. 아들이 한심하다고 느끼면서도 한편으론 안쓰러움이 더 컸기 때문일 겁니다. 아들이 왜 사업에 실패했는지, 부도덕한 짓을 하진 않았는지 그런 건 묻지 않기로 했. 그저 다 '지난 일'이라며 아들을 위로합니다. 그리곤 조용히, 고이 모아둔 '쌈짓돈'을 장에서 꺼내 허겁지겁 밥을 먹는 아들의 손에 쥐어줍니다.

사진 출처: 픽사베이

국가에 대한 시청자들의 사랑도 이와 크게 다를 바 없습니다. 시청자들은 자신의 조국(아들)이 과거에 어떤 침략전쟁, 전쟁범죄를 저질렀고(사업 실패) 그로 인한 과거 청산의 책임(빚)에 쫓기고 있는 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알면서도 애써 입을 다물죠. 어머니가 그랬듯, 시청자들에게 중요한 것은 '어쨌든' 지난 일은 흘려버리고 '지금부터라도' 잘하는 것입니다. 과거에 부끄러운 잘못저질렀다고 해도 결국 자기 나라에 대한 사랑으로 이를 극복(?)해나갈 것이라는 말입니다. 시청자들은 혼신 어린 응원(쌈짓돈)을 통해 자기 나라의 입장을 지지할 것입니다.


결국엔 '미워도 다시 한번'. 자기 나라를 향한 시청자들의 놀랍고도 헌신적인 사랑은 이번 우크라이나 전쟁에서도 여실히 증명되고 있습니다.




앞서 저는 러시아의 전쟁범죄를 비판하는 일부 국가들의 (과거사에 관한) '내로남불'에 가까운 위선지적한 바 있습니다. 러시아의 전쟁범죄를 규탄하면서도 자기 안의 전쟁범죄는 책임지지 못하는 일본, 제노사이드 논쟁으로 갈등하는 프랑스, 국제형사재판소(ICC)에 가입조차 하지 않았으면서 전쟁범죄를 운운하는 미국 등의 사례를 제시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논쟁이 국적이 다른 '우리 편' 시청자들 사이의 감정 대립을 일으키고 있다고 언급했죠. 한편, 과거사의 '악당'으로 지목받은 국가들은 논쟁을 어떻게든 회피하려고 노력합니다. 과거사의 공론장에서 도망쳐 나와 '어머니'(시청자들)의 품으숨어버리는 거죠.


이 한 무리의 '탕아'들은 어머니가 베푼 사랑과 위안 그리고 '쌈짓돈'을 토대로 마음을 추스른 뒤 힘을 얻고, 며칠 뒤 새로운 사업에 도전하기 위해 또다시 고향을 떠납니다. 대문 앞에서 걱정하는 어머니(시청자)를 향해선 이렇게 호언장담하죠. '엄마! 내가 한몫 제대로 벌어서 호강시켜줄게!' 여기서 '한몫' 이란, 우리 이야기의 주제로 바꿔 말하면 이 말입니다. '국익'.

사진 출처: 픽사베이

가령 미국의 방산 업계는 우크라이나 전쟁을 맞아 때 아닌 호시절을 보내고 있습니다. 여기서 펑펑 솟아나'돈다발', 즉 국익은 우크라이나 전쟁에 대한 미국의 정치적 책임을 지적하는 국내의 '반동적' 시청자들의 입을 오므라들게 할 테죠. 더구나 이 무기들은 '우크라이나를 지원하기 위해' 생산된다는 측면에서 그럴듯한 명분도 얻을 수 있습니다. 실제로 지난 4월 중순, 미국의 국방부 부장관인 캐슬린 힉스와 록히드 마틴, 레이시온 등 미국의 8대 군수업체 대표들은 크라이나 전쟁에 제공될 미국의 무기들에 대한 즐거운(?) 논의를 나눴습니다.


고로 세계 10대 방산업체 중 5곳이 미국의 기업입니다. 스톡홀름국제평화연구소(SIPRI)는 이들 5개 기업의 주가가 우크라이나 전쟁을 전후한 6개월 동안 10~18%가 올랐다고 분석했습니다. 한 전문가는 미국의 군수산업이 '골드러시'와 같은 기회를 잡았다고 평가합니다. 레이시온 회장 그레고리 헤이스의 발언은 더 노골적입니다. 그는 우크라이나로 운송되고 있는 '모든 무기가 미 국방부와 나토(NATO)의 비축 무기'라는 점을 강조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것은 굉장히 좋은 소식입니다. 결국에는 우리가 비축 무기를 다시 채워야 하고 이는 향후 몇 년에 걸쳐 사업에 이득이 될 것입니다."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미국의 무기는 정의구현하는 중요수단입니다. 설령 미국이 방위산업으로 떼돈을 번다 한들 누가 뭐라 할 수 있을까요? 과거의 미국이 전쟁범죄를 저질렀다고요?' '미국의 무기가 평화를 파괴시켜왔다고요? '우크라이나를 위하여'라는 슬로건 아래 이런 물음들은 공허하게 메아리 칠 뿐입니다. 이 같은 미국의 흐뭇함은 지난 5월, 록히드마틴의 무기 생산 공장을 방문한 조 바이든 대통령의 연설에는 그대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재블린 미사일*의 역할은 너무나 중요합니다. 심지어 우크라이나에서는 부모들이 아이들의 이름을 재블린, 재블리나라고 짓는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입니다."

*재블린 미사일: 미국에서 개발·제작된 대전차 미사일. 전쟁 초기 우크라이나군에 지원, 활용되며 러시아군 기갑전력에 엄청난 피해를 가져다주었다.


미국의 시청자들은 내심 만족해할 겁니다. 이 역시 어머니의 마음. '쌈짓돈'을 쥐고 집을 나선 아들이 사업에 성공했다는 소식을 들은 것처럼 뿌듯해할지도 모릅니다. 이해합니다. 상황이야 어찌 됐든 지금 미국은 '국익=돈'으로 정의를 거머쥐었습니다. 다만 이 사실도 좀 기억했으면 좋겠네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면서 사용한 무기에 미국, 유럽, 아시아 국가의 부품이 대거 발견되었다. 영국 왕립합동군사연구소(RUSI)가 분석한 450여 개의 외국산 부품 중에는 미국 기업이 만든 부품이 317개로 가장 많았다. 익명의 우크라이나 고위 관리는 “미국 칩 없이는 러시아 미사일과 대부분의 러시아 무기가 작동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잭 와틀링 RUSI 육상전 연구원은 “서구 전자제품에 매우 의존적인 러시아의 무기가 우크라이나인 수천 명의 죽음을 초래했다”라고 평가했다.




물론 모든 국익이 '돈'으로만 연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힘(power), 영향력을 얻는 것도 국익 확장의 우회적인 수단이기 때문입니다. 그 길을 택한 대표적인 주자는 바로 일본입니다. 일본은 2차 대전 이후 막혀있던 군사력 건설, 즉 전쟁 가능한 국가로 발돋움하기 위한 지렛대로써 우크라이나 전쟁을 이용했습니다. 다시 어머니와 아들의 비유로 돌아와 볼까요? 아들은 어머니를 향해 이렇게 소리칩니다.


"엄마! 무너진 우리 가문, 내가 어떻게든 다시 일으켜 볼게!"

사진 출처: 픽사베이

2차 대전에서 패배한 일본은 전범국으로서의 과오를 반성하고 국제평화를 성실히 희구해나간다는 정신에 의거해 현행 일본 헌법(1946)을 제정했습니다. 이 헌법은 일본의 국제적 무력행사와 군대의 보유를 전면 금지(제9조)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평화헌법'이라고도 불리죠. 그러나 잘 아시다시피, 2000년대 이후 일본 사회는 급격한 우경화로 치달았습니다. 이 우경화의 물결은 헌법을 개정해 군대(자위대)의 보유를 공식화하고 한발 더 나아가 전수방위의 원칙*도 탈피해보자는 주장 등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전수방위의 원칙: ①상대로부터 무력 공격을 받았을 때에만 방위력을 행사하고 ②관련 대응 또한 자위를 위한 최소한에 그치며 ③보유하는 방위력 또한 자위를 위한 최소한의 것으로 한정하는 것


그들에게 우크라이나 전쟁은, (우익들의 표현에 따르면) 무너진 일본의 정신을 일으키고 헌법 개정 등을 통해 진정한 '독립'을 시도해볼 수 있는 최대의 기회였을 겁니다. 그래서였을까요. 일본은 우크라이나 전쟁이 동반하는 '위기의 가능성'을 그 어떤 나라보다 강력하게 선전했습니다. 위기감은 곧 적에 대한 상상을 불러일으키게 되죠. 전쟁 심리학의 훌륭한 분석서  『전쟁에 대한 끔찍한 사랑』을 저술한 바 있는 제임스 힐먼 적에 대한 상상이 '전쟁을 부르는 추동력'이 될 수 있음을 경고합니다. 특히 "국가의 필요에 의해 공격적인 선전활동과 비장한 애국심으로 고무되었을 때" 더욱 그러하죠.



힐먼의 경고를 실천이라도 하듯, 기시다 총리는 우크라이나 전쟁이 2차 세계대전 이후 "최대의 위기"(2022.3.27.)라고 언명한데 이어 "우크라이나는 내일의 동아시아 일지도 모른다"(2022.6.26.)는 등 무시무시한 말들을 일본 시청자들에게 주입했습니다. 올해 7월 사망했지만 일본 우익들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해왔던 아베 전 총리도 우크라이나 전쟁을 철저히 이용했죠. 그는 우크라이나가 1994년 부다페스트 각서를 통해 핵을 포기했던 상황을 교훈 삼아 일본도 '핵 공유(nuclear sharing)' 정책을 논의할 필요가 있다는 폭탄발언을 쏟아냈습니다. 적의 기지나 중추를 선제적으로 공격하는, 이른바 '적 기지 공격 능력'을 보유해야 한다고도 역설했죠. 전수방위의 원칙을 사실상 파괴하는 주장들입니다.


일본 국민들은 이러한 위기감을 온몸을 받아들였습니다. 지난 4월 조사에 따르면 일본 국민의 64%가 방위력 강화에 찬성했고 군사력의 실질적 투사를 상징하는 '적 기지 공격 능력'과 '집단적 자위권 행사'에 대해서는 각각 46%, 58%가 찬성 의사를 표시했죠. 이 같은 '찬성'여론은 앞으로 더 활발하게 불타오를 것으로 보입니다. 문제는 그렇게 주입된 위기감, 공포감이 끝내 어떻게 표출될 것이냐에 대한 부분이죠. 과거 일본의 침략으로 고통받은 경험이 있는 한국, 그리고 아시아 국가의 시청자들이 볼 땐 상당히 우려스러운 지점입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과거를 기억하고 반성하라'라고 외쳐볼까요? 아니면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라고?


안타깝지만 일본 시청자들의 귀는 좀처럼 잘 열리지 않을 것 같습니다. 무력이 선사하는 위기감 앞에 과거사 논쟁 '따위'는 하잘것없는 탁상공론으로 전락하겠죠. 제임스 힐먼은 계속해서 경고합니다. 이처럼 공포에 중독된 사람들이 선택하게 될 최악의 상황을 예언하면서 말이죠.


"그리하여 마침내 우리는 절박한 심정에 사로잡혀 고귀한 선전포고라는 위선으로 우리 자신을 은폐한다."


사진 출처: 픽사베이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일본이 또 다른 전쟁을 일으킨다? 아뇨. 아무리 그래도 그렇게까지 극단적인 상황일어나지 않을 겁니다. 다만 전범국의 멍에를 벗어나 과거의 영광을 되찾는다는 목표 (='엄마! 무너진 우리 가문, 내가 어떻게든 다시 일으켜 볼게!')라는 염원은 이뤄질지도 모릅니다. 엄마(일본의 시청자들)는 매우 초조해하면서도 언젠가는 돌아올 당신의 아들을 기다리겠죠. 과연 누가 그 탕아가 되어줄까요?


지금 이 시간에도 무수히 많은 탕아들이 시청자들의 사랑과 위안 그리고 '쌈짓돈'을 받고 집을 나섭니다. 우크라이나 전쟁은 누군가에게 그런 기회의 시간입니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한창이던 7월 8일, 아베 전 총리는 사망했습니다. 그는 '돌아온 탕아'가 될 수 없었죠. 하지만 아베는 '8년 8개월', 일본 역대 총리 중 가장 오랜 기간을 집권했습니다. 하지만 일본의 시청자들도 '8년 8개월', 그의 집권 아래 있었죠. "일본을 되찾는다(日本を取り戻す)" 그것이 아베의 슬로건이었습니다. 언제, 어떤 일본을 말하는 걸까요? 다시 말씀드리지만 탕아는 언젠가 돌아옵니다.


"러일전쟁은 식민지 지배 아래에 있던 많은 아시아와 아프리카 사람들에게 용기를 북돋워주었습니다."  -아베 총리 전후 70주년 담화(2015.8.14.)-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