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누군가 내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그래서 한국은?"
순간적으로 입이 오므라들었습니다. 그동안 미국이 어떻고 일본이 저떻고, 신나게 '아는 체'하면서 '우리 편'의 위선을 지적해왔는데 말이죠. 아아, 인정합니다. 아무래도 저는 시작부터 틀렸던 모양입니다. 따지고 보면 저의 이런 지적질이야말로 위선의 결정판이었습니다. 마치 견실한 '평화주의자'인양 우크라이나 전쟁을 주제로 올려놓고 떠들지만 실재론 한 발짝도 성숙하지 못했던 겁니다. 하여 지금이라도 (늦었지만), 톺아보고자 합니다. 사랑해마지 않는 내 조국, 한국이 '위선의 직판장'에 등장하던 순간들을 말입니다.
한국은 우크라이나 전쟁을 세계 그 어떤 나라보다 기민하게 국내 정치로 끌어들였습니다. 사실 그럴 수밖에 없었습니다. 환경이 좋았달까요? 우크라이나 전쟁이 시작될 무렵, 한국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있었습니다. 대통령 후보들에게 우크라이나 전쟁은 안보를 미끼로 국민들의 관심을 끌 수 있는(안보 포퓰리즘) 굉장히 좋은 재료였습니다. "전쟁이 지난 정치적 잠재력에 버금갈 만한 것은 사실 이 세상에 없기 때문"(레이첼 매도)이죠. 지금 한국의 '대통령님'(당시 후보)은 이 말을 아주 훌륭하게 실천했던 사람입니다. 일찌감치 '북한 선제타격론'을 거론, 매파적 본색을 가감 없이 드러내고 있던 그에게 우크라이나 전쟁은 아주 좋은 기회였을 테죠.
그는 진부하지만 확실한 또 유구한 전통을 가진 선전법으로 한국 시청자들의 마음을 뒤흔들었습니다. 우크라이나 전쟁의 긴장감을 한국전쟁의 트라우마와 연결시켰던 거죠. 이념적인 측면(반공)에서도 우크라이나 전쟁과 한국전쟁은 링크가 잘 맞습니다. 한국전쟁은 "역사상 최초의 이데올로기 전쟁"(서중석)이었고 러시아의 전신인 소련은 한국전쟁을 도발한 중대한 책임을 지고 있는, 이른바 '공산세력'의 구루(guru)였죠. 때문에 한국의 시청자들은 어렵지 않게 러시아를 '적'으로 상정할 수 있었습니다. '대통령님'이 현충일 추념사에서 "공산 세력의 침략"을 콕 집어 언급한 것도 우연은 아니었겠죠.
게다가 이 선전법은 매우 간단하고 수월한 논리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 or 일어나서는 안 된다' '누구처럼' '되지 않으려면' '힘을' '길러야' 한다. 실제 우리 '대통령님'의 발언을 빌려 한번 실습해보도록 하죠.
"우크라이나 상황은 결코 남의 일이 아니다."(우리에게도)
"우크라이나 사태가 한반도 지정학적 리스크로 연결"(이런 일이)
"핵무기를 보유한 북한이 이런 위기상황을 틈타 대남 도발을 할 경우"(일어날 수 있다)
"'부다페스트 양해 각서'라는 종이 각서 하나를 믿고 스스로 무장을 해제한"(누구처럼)
"우크라이나 사태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교훈"(되지 않으려면)
"힘을 통한 평화를 구축"(힘을 길러야)
'대통령님'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이튿날에는 우크라이나 전쟁의 교훈을 '선제타격론'까지 확장시켰습니다. "선제타격 능력 확보"가 곧 전쟁의 예방이라는 논리였죠. (선제타격의 대상이 누구인지는 말할 것도 없겠지만) 그리곤 이렇게 덧붙였습니다. 우크라이나는 "확실한 힘과 강력한 동맹을 하나도 갖추지 못"했으며 그들의 부다페스트 각서처럼 "종이와 잉크로 된 협약서 하나 가지고는 안보와 평화가 지켜질 수 없다"라고 말이죠. 그런 한편 상대편 후보들이 주장하는 신중론에 대해서는 '유약하다'라고 평가절하했습니다.
우크라이나 전쟁을 일종의 발사대로 삼아, '대통령님'이 쏘아 올린 '작은 공'은 매캐한 화약의 냄새를 흩뿌리며 한반도에 내려앉았습니다. 그의 유세장에는 우크라이나 국기가 휘날렸고 유명 포털에는 "자유의 나무는 피를 먹고 자란다", "자유는 공짜가 아니다" 등등의 격언들이 현수막처럼 내걸렸죠. 그가 상대 후보를 '유약하다'라고 면박한 것처럼, 데탕트를 외치는 평화주의자들은 이단자 마냥 취급됐습니다. 실제로 국내의 한 주요 일간지는 "우크라이나 전쟁을 조롱하는 이 땅의 평화주의자들"이라는 도발적 제목의 기사로 평화주의자들을 '조롱'했죠. 우크라이나 전쟁을 한국전쟁과 대비시키는 '교훈론' 또한 지겹도록 반복(repeat) 되었습니다.
윤석열 후보 유세 현장에 등장한 우크라이나 국기(출처: 뉴시스)
물론, 힘에 의한 평화론도 충분히 이해해볼 여지는 있습니다. 우크라이나 전쟁을 한국전쟁과 대비시켜 -설령 그것이 한국인의 트라우마를 자극한다고 항할 지라도- 교훈을 삼는 것도 나쁘다고만은 볼 수 없죠. 국민적 불안이 생겨나는 것 또한 부자연스러운 일이 아닐 겁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렇게 불 지펴진 '불안'이 전쟁 시작 10개월이 다되어가는 지금까지도 여전히 수습되지 않고 집요하게 들러붙어 있다는 점입니다. 어느 순간부터 한국의 시청자들은 북쪽만 바라보고 있습니다. 분명 전쟁은 우크라이나에서 일어나고 있는데 고개는 자꾸만 북쪽으로 기울어집니다. 평화와 안정은 꿈결 속에서나 얘기할 수 있을 정도로 척박한 단어가 되었습니다. 저 또한 시청자의 한 사람으로서, 지금 이 순간에도 밑을 닦지 않은 듯한 찝찝함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도대체 왜 이런 걸까요? 혹시 우리도 모르는 사이 누군가 '불안의 땔감'을 가져다 태우고 있었던 건 아닐까요?
지금 돌이켜보자면 '불안의 땔감'은 분명 존재했던 것 같습니다. 특히 우크라이나 전쟁을 촉매 삼아 피어올랐던 '대통령님'의 선제타격론, 그 호전성은 고스란히 한국군 지휘관들에게 이식되었습니다. 실제로 이종섭 국방부 장관과 군 서열 1위인 김승겸 합참의장은 전쟁이 임박한 상황에서 '자위권 차원의 선제타격'이 가능하다는 것을 백일하에 공언하고 나섰습니다.
자위(自衛). 좋은 말입니다. 온전히 방어적 입장에서, 국민을 지키기 위해 무력을 행사하는 것은 국제법적으로도 인정되는 정당한 권리죠. 문제는 이 자위라는 개념을 적용할 수 있는 범위가 대단히 모호하다는 점입니다. 물론 개념적으로는 전쟁 또는 북한의 핵·미사일 발사의 징후가 '명확한 경우'에 한하여 발동한다고 되어있습니다만. 이 '명확한 경우'의 객관성을 어떻게 담보하죠? 그리 쉽진 않을 겁니다. 어찌어찌 기준을 마련한다고 해도 정치적인 결단에 휘둘릴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죠.
요컨대 자위권의 행사는 대단히 엄격하게 고려돼야 할 사안이라는 겁니다. 그 때문에 역대 한국 정부는 자위권의 행사 범위가 확대 적용되거나 오용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힘써왔습니다. '선제타격'이라는 개념을 교리적으로는 인정하면서도 구태여 언급하지 않았죠. 북한을 자극하지 않기 위함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대통령님'은 수면에 잠자고 있던 이 위험한 전쟁의 버튼을 틈만 나면 만지작 거리고 있습니다.
역사적으로도 '자위권'은 요용 된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당장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략하면서 내세운 명분 중의 하나가 '자위권의 행사'입니다. 북한은 늘 자신의 핵무력이 자위를 위한 것이라고 광고합니다. 조금 더 멀리 가볼까요? 일본은 러일전쟁 당시 '국가의 존립 목적 달성을 위한 전쟁'(다카하시 사쿠에이高橋作衛)을 개전 명분의 하나로 내세웠습니다. 태평양전쟁 때는 “극동에서 미국‧영국‧네덜란드의 근거를 복멸 하여 자존자위를 확립”한다는 전쟁 종결구상을 채택했습니다. 하나같이 '자위'를 핵심 명분으로 삼았죠.
사진 출처: 픽사베이 이처럼 자위론은 한순간에, 해석하기에 따라 침략의 논리로 변질될 수도 있습니다. 이에 철학자 칸트는 자신의 저서 『영구평화론』에서 그와 같은(자위의 논리를 오용하는) 궤변들을 예문으로써 설명하기도 했습니다. 아래와 같이 말이죠.
"... 인접한 민족을 정복했을 경우, 책임은 인간의 본성에 있다고 주장하고, 인간이라고 하는 존재는 타인에게 폭력을 먼저 가하지 않으면, 타인이 먼저 자기에게 폭력을 가하고 자신을 정복하게 될 것이 분명히 예상되기 때문이라고 주장하라."
그러나 칸트의 이러한 경고도 시청자들의 마음에 가닿진 못합니다. 불안하기 때문입니다. 지난 4월, 북한은 우리 '대통령님'의 선제타격론에 맞서 '핵 무력 선제사용'이라는 무시무시한 카드를 들고 나왔습니다. 9월에는 급기야 핵무력 사용과 관련한 법령을 채택했습니다. 끊임없는 악순환인 거죠. 선제타격을 하겠다는 쪽을 선제 타격하겠다.
끊임없이 '선제에 선제를 더해봤자' 시청자들에게 남는 것은 불안뿐입니다. 불안을 느낀 시청자들은 끊임없이 힘에 매달립니다. 이렇게 시청자들이 불안증에 걸려 힘(무력)을 호소할 때, '대통령님'이 주창한 '힘에 의한 평화'는 은근한 미소를 짓게 될 겁니다.
지금 한국 시청자들은 이 불안증이 어떻게 생겨났는지 조차 알 수 없게 돼버렸습니다. 그저 어렴풋이, 우크라이나 전쟁 즈음부터 고조되기 시작했다는 정도만 기억하고 있을 정도죠. 그 불안을 누가, 어떻게, 왜 퍼트렸고 왜 여태껏 이어지고 있는지 알려하지 않습니다. 시청자들이 원하는 건 그저 이 불안의 진통이 조금이라도 덜어지는 것입니다. 이 불안의 진통제는 바로 '힘'입니다.
2022년 현재 한국의 '대통령님'이 우크라이나 전쟁과 함께 등장(당선)했다는 점은 한국의 시청자들에게 참 공교로운 일입니다. 한국의 시청자들은 그때부터 진통제를 지속적으로 투여받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이런 거죠.
'우크라이나 전쟁 때문에 무서우시다고요? 북한이 그럴까 봐 또 무서우시다고요? 아, 핵이 무섭다고요?'
'그럼 '핵 주사'를 놔드릴게요.'
사진 출처: 픽사베이 5월 21일, 한미 정상회담이 열렸습니다. 공동선언문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국제 질서에 위협을 가하고 있다는 공통된 인식을 토대로 미국의 한국 방위에 대한 공약을 재확인하는 등의 내용을 담고 있죠. 이 회담의 성과는, 여러 언론이 주지했듯이, 미국이 한국에 확장억제를 제공하는 수단 중 하나로 ‘핵’을 명시했다는 것이었습니다.
"바이든 대통령은 핵, 재래식 및 미사일 방어능력을 포함하여 가용한 모든 범주의 방어역량을 사용한 미국의 한국에 대한 확장억제 공약을 확인하였다." -한·미 정상 공동성명(2022.5.21.)-
아마 몇몇 한국의 시청자들은 이 같은 미국의 듬직한 말에 강력한 진통효과를 체감했을 겁니다. 그 안도감은 보수언론들의 논조에서 무엇보다 확연히 드러나죠. 핵이라는 강력한 힘에 도취돼, 포대기에 푹 안긴 듯한 안락감을 느꼈을지도 모릅니다. 자그마치 미국의 대통령이 저런 약속을 해줬으니 말이죠.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진통제입니다. 불안은 곧 다시 몰려오게 돼있죠.
이를 잘 설명하는 조사가 있습니다. 2022년 아산정책연구원의 <한국인의 한미관계 인식> 여론조사에 따르면 한국의 '독자 핵무장'에 대한 지지 여론은 역대 최고인 70.2%에 달했습니다. 남북관계의 순풍이 불던 2018년에 비해 15%나 증가한 수치죠. 미국의 한반도 '전술핵 재배치'에도 59%가 찬성 의견을 보였습니다. 또 ‘미국’ 하면 먼저 떠오르는 것으로 '막강한 군사력'(37.3%)을 가장 많이 꼽았죠. 리포트는 이 같은 결과의 중요 변수로 우크라이나 전쟁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 여론조사가 실시된 시점이 우크라이나 전쟁 초기인 3월이라는 것 또한 주목해볼 만한 지점이죠. '그리고 그때 그가 그렇게 우리 곁에 왔다.'
아산리포트 <한국인의 한미관계 인식>(2022), 출처: 아산정책연구원 홈페이지 문득 궁금해집니다. 한국인(시청자)들의 뜻대로 자체 핵무장을 하게 되면 이 같은 불안은 완전히 해소될까요? 그렇다면 좋겠지만 글쎄요. 저는 좀 부정적입니다. 지금 우리 시청자들은 또 다른 진통주사가 팔뚝에 꽂히기만을 기다릴 뿐입니다. 대통령님?
"마치 평화를 누리는 것이, 즉 “아늑하고 과도하게 안전한 세계의 한구석”에 있는 것이 우리를 안절부절못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처럼 되었다. 마치 우리는 무장 충돌이 일어나지 않는 상황에서는 우리의 가장 훌륭한 모습을 보이는 방법을 더 이상 알지 못하는 것처럼 되었다." -레이첼 매도, 『전쟁국가의 탄생』 , 7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