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여름이 왔다. 작년보다 더 무더운 느낌이다. 비는 장마라 했던 기간에 몇 번 오더니 더 이상 내리지 않는다. 주로 남풍이 불어오는 이 여름에 한라산 능선에는 짙은 구름이 자주 걸쳐졌다. 푄 현상에 의해, 한라산을 넘은 공기는 수증기를 덜어내고 좀 더 더워져 제주를 덮쳤다. 바람 많은 섬이라지만 이런 시기에는 바람도 잘 불지 않는 데다가 불더라도 덥고 습한 공기가 짜증을 더할 뿐이다. 능선의 동쪽으로 두터운 렌즈구름이 형성되면 각종 포털에는 제주소식을 전하는 기사거리가 된다. 바다는 호수처럼 잔잔해지고 해안 가까이엔 폭발하는 섬광 같은 한치 배 불빛들이 점점이 자리한다. 주차장 지붕 모서리에서 어미가 물어다 주는 먹이를 열심히 받아먹던 새끼 제비들은 폭염이 시작되기 전에 날갯짓을 하더니 집을 떠났다. 마을을 가로지르는 작은 찻길과 집 마당에는 잠자리 떼가 부산하게 움직였다. 땀이 많은 나 역시 바깥에만 나가면 쉴 새 없이 머리와 목으로 땀이 흘러 순식간에 셔츠를 적셨다. 해마다 반복되는 여름의 풍경이 펼쳐지고 있다.
뜨거운 고기압에 의해 거대한 열공간에 갇혀 나라 전체에 비가 오지 않는다고 한다. 덥고 비 없는 날이 3주 정도 되어 간다. 마당의 잔디들은 비 없는 더위에 잎을 바늘처럼 가늘게 말았다. 텃밭의 작물들도 생기 없이 축 쳐져 있었다. 사람이 자주 주는 물이 비 한 번 내리는 것만 못하다. 그렇다고 말라가는 작물들을 바라보기만 할 수는 없으니 나는 일찍 퇴근하는 날이면 가방을 내려놓자마자 호스를 들고 텃밭에 물을 주었다. 이틀에 한 번, 이른 저녁에 무더위에도 극성인 풀모기들과 싸우며 텃밭과 마당의 나무들에 물을 주었다.
작물들은 비가 없는 폭염에 힘겨워하고 있었다. 사람이 가끔씩 뿌리는 물 정도로는 소용이 없었다. 가지는 열매가 맺혀 조금 자라는 듯 싶다가 볼품없는 크기 그대로 익어버렸다. 고추들도 마찬가지였다. 개수도 얼마 되지 않는데 작고 창백하게 열리다가 그대로 붉게 변하기 시작했다. 호박과 물외는 덤불 속에서 어쩌다 하나씩 발견되었는데 수분없이 울퉁불퉁했다. 모양도 고르지 못하고 군데군데 썩은 곳도 있었다. 방울토마토는 내가 해 주는 전정 속도보다 빨리 가지를 뻗어 덤불이 되었고, 맺히는 열매도 얼마 되지 않는 데다 수분이 없어 작고 메마른 채로 붉게 익어갔다. 바질은 날이 더우니 꽃대가 금방 올라왔다. 게다가 올해는 유난하게 풍뎅이들이 달라붙어 잎을 갉아먹었다. 폭염 속에 중간중간 비를 만나기 전까지 텃밭은 힘겹게 버텨나가는 공간이 되겠지만, 올해 바질 농사는 온전히 망쳐버린 게 분명하다.
집 부근의 밭들에는 하루 종일 스프링클러가 돌고 있었다. 어떤 때에는 밤새 돌기도 했다. 나도 텃밭에 스프링클러를 설치할까 자주 고민한다. 하지만, 스프링클러를 둘 정도로 넓은 밭도 아닌 것 같고, 새로운 것 하나 설치하는 일이 귀찮은 게으름도 생겼다. 마당에 주는 물이 농업용수도 아니고 상수도인데 스프링클러까지 설치하면 상수도 요금은 얼마 정도 나올까 가늠도 해 보았다. 마당 호스로 물 한 번 주기 시작하면 꼬박 한 시간을 서서 작업해야 한다. 그렇게 물을 주면서 구석구석 물을 뿌리고 작물들의 상태를 살피는 것이 차라리 낫지 않나 하는 생각에 고민을 접었다. 이러다 시원하게 비 한 번 내리면 녀석들은 내가 물을 줄 때와는 다른 생기와 활력을 뿜어낼 것이다. 얄밉거나 서운할 정도로 말이다. 그렇게 나와 텃밭의 작물들을 근근이 여름을 이겨나갈 것이다.
마당의 대부분을 제 공간인 양 활보하고 다니는 반려견 라이 녀석도 생애 처음 겪는 여름의 무더위에 지치기는 마찬가지였다. 아침 해가 뜨면 동쪽의 옆집 그림자에 들어가 누워 잠을 자다가 해가 높아지면 제 집 옆의 티트리 나무 그늘 구석으로 숨어 들어갔다. 혀를 길게 내밀고, 사람이 오가는 일이 아니라면 그늘에서 나오지 않았다. 이 녀석은 물을 싫어한다. 내가 텃밭과 나무에 물을 주려 마당 호스를 들기만 해도 꼬리를 내리고 멀리 떨어져 긴장한다. 너무 더우니 물놀이라도 하라고 넓고 커다란 고무대야에 물을 받아 집 옆에 두었는데, 녀석은 가까이 가려하지도 않았다. 억지로 끌고 와서 앞 발을 물속에 담가주었는데도 녀석은 바로 도망쳐버렸다. 한여름에 물을 싫어하다니, 이해할 수는 없지만 개들의 다양한 성향 중 하나이니 존중해줄 수밖에 없다. 내 바람은 고무대야를 들어갔다 나왔다 하며 물을 즐기고, 함께 바다에 나가면 같이 들어가 물놀이도 즐기는 녀석을 기대했는데 말이다.
에어컨이 잘 돌아가는 병원에서 진료를 보는 것 외에 이 여름을 가장 시원하게 보낼 수 있는 방법은 건프라 작업이다. 요즘엔 넓은 집에 나 홀로 있으니 넓은 거실에서 에어컨을 가동하기엔 부담스럽고, 따로 떨어진 컨테이너 작업실에 들어가 에어컨을 가동하여 놓고 시원한 공간에서 건프라 작업을 하는 것이 제일 낫다. 덥고 습한 한 여름에 건프라 도색은 조심스럽다. 에어브러시로 착색을 시키다 보면 습기와 섞여 도색이 하얗게 뜨기 쉽기 때문이다. 그래서, 작업실 온도와 습도를 충분히 낮추어야 하는데, 그런 면에서 에어컨은 필수인 셈이다. 적당히 아담한 공간에 에어컨을 가동하면 금방 시원해진다. 라디오를 틀어놓고 필터 마스크를 착용한 다음 작업을 시작한다. 런너에서 부품을 떼어내고 다듬어서 사포질을 하고 에어브러시로 도색을 한 뒤 집게로 고정시켜 말린다. 라디오 방송을 들으며 특별한 생각 없이 가벼운 머리와 마음으로 설명서대로 작업을 하다 보면 시간은 금방 흐르고, 차가워진 실내공기에 같이 차가워진 유리창에는 바깥으로 서리 끼듯 물방울이 맺힌다. 마스크를 벗으면 신너 냄새 자욱한 작은 공간이지만, 왠지 작업을 그만두고 싶지 않고 바깥으로 나가고 싶지 않다. 그래서 요즘은 일주일에 하루 정도 하던 건프라 작업을 특별한 일정이 없는 퇴근 후 저녁마다 이어가고 있다.
더위에 취약한 몸뚱이를 가지고 있다. 나와 같은 공간을 살아가는 거의 모든 것들이 비 없는 폭염에 힘겨워한다. 나 자신과 그것들을 챙겨가며 하루하루를 버티고 견뎌나가고 있다. 그래도 여름은 즐길 것들이 다양해서 좋다. 올해는 한치가 풍년이어서 바다에 나가 한치를 잡아 오기도 했고, 무늬오징어의 당찬 손맛도 즐길만하다. 바다도 따뜻해졌으니 한담 바다에서 스노클링도 종종 즐긴다. 더운 날의 맛있는 수제 맥주도 매력이다. 여름은 해마다 찾아오고, 나는 여름을 나야하는 숙제와 여름을 즐기는 여유를 동시에 안아 든다. 여름에도 꾸준히 이어나가야 할 것들과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을 머릿속에 정리하면서 소시민으로서의 삶을 누리고 즐긴다. 비를 기다리고 시원한 바람을 기다린다. 마주한 사람들 앞에서 민망하게 땀이 줄줄 흘러내리지 않을 가을의 선선함을 기다리며 폭염의 시기를 견뎌낸다. 올해의 여름이 지나가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