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과 맞붙은 넓다란 공터에 자신의 텃밭을 가꾸는 옆집 할머니의 손길은 경이롭다. 이른 아침이나 늦은 오후에 챙 넓은 모자와 헐렁한 모시적삼 차림으로 텃밭 한바퀴를 휙 돌고는 물 잠깐 주고 들어가신다. 드러난 팔의 피부는 윤기가 사라진지 오래고 늘어난 살에 주름이 확연하지만, 그 팔이 텃밭덤불 사이로 한번씩 뻗어 들어가면 마치 주변의 작물들이 생기를 얻어 풍성해지는 것 같다. 열 평 남짓되는 나의 텃밭을 비지땀에 헉헉거리며 하루종일 붙들고 있을 때, 옆집 할머니는 우리 텃밭의 열 배 정도 넓이의 밭을 잠깐씩 여유로이 거닐며 관리한다. 성장의 차이가 확연하게 다른 두 밭을 나란히 보고 있으면, 연륜의 두터움과 손길의 감각을 깊이 느끼게 된다.
텃밭 작물들 사이에 쭈그리고 앉아 김을 매거나 수확을 하는 할머니의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자면, 가끔 그런 생각이 들곤 한다. 자신이 삶아오며 쌓은 삶의 에너지를 점점 짙어지고 자라나는 초록들에게 부어넣어주고 있는 것 같다. 그렇지 않고서야, 바로 맞은편에서 체력이 방전될 때까지 잡초를 뽑고 물을 주며 자잘한 관리를 해주는 나의 텃밭보다 더 짙고 무성하게 자랄 수 없을 것 같으니 말이다. 윤기가 사라지고 늘어진 살과 주름이 온 몸 가득한 노인의 현재는, 생을 통해 축적한 농도짙은 기운을 주변으로 발산하며 희생의 시간을 잇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 기운은 가끔씩 나에게도 전해진다. 서리태 씨앗을 한 컵 주시며 심어보라던가, 어느 시기에 어떤 작물을 심어야 한다거나 음력 3월 1일이 지나야 봄 텃밭을 시작한다는 노하우를 알려주신다. 그것은 정해진 것을 가르치는 딱딱함이 아니다. 할머니의 몸에 배인 무언가를 조금씩 뚝 떼어 전달하는 느낌이다. 감사한 마음으로 받아들어 심고, 말씀대로 시기를 가늠해 몸을 움직이면 틀림이 거의 없는 경과를 경험할 수 있는 것이다.
몸을 움직이는 노동을 할 때면, 나는 노인들의 기운과 경험에 무한한 경외를 느낀다. 과거의 시대에 천착하여 현재를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는 시선에 안타까움은 있지만, 나이듦이 축적하는 삶의 근본이 되는 지혜는 절대적으로 받아들여야만 하는 것이다. 자본이 모든 것을 압도하고, 노동의 고난과 경험가치 마저도 쉽게 사고팔 수 있는 시대라서 노인은 더욱 소외되어버린다. 그러나, 삶의 근본지혜는 생존의 필수덕목이기도 해서, 가치매김 이전에 인간으로 반드시 갖추어야 할 감각이자 기운이다. 삶이 얼마 남지 않은 이가 발산하고 나누어주는 경험과 에너지는 인간 종속의 중요한 유산이다. 이른 주말 오후 퇴근하자마자 장화를 신고 장갑낀 손에 호미를 든 내가 비처럼 쏟아지는 땀을 흘리다 바라본 옆집 할머니의 느릿한 몸짓은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일상을 살아가면서 주변에 감각을 예민하게 세우고, 보이는 것들을 미분하여 집중하는 일은 소중하다. 일상에의 짙은 애정이기 때문이다. 일상에의 짙은 애정이 필자가 소유한 지식이나 사유에 겹쳐 생각의 가지로 뻗는 일 역시 중요하다. 일상은 현실이기도 하거니와, 순간 순간이 삶의 물리적 화학적 반응 속에서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것을 글로 풀어내어 타인과 공유하는 일은 가치있는 일이다. 표현하지 못했던 자신의 느낌을 타인의 글에서 만나 공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고보면, 살아가는 일은 매순간이 느끼고 생각하고 풀어내는 대상의 연속이다.
다만 감성만으로 풀어내는 일을 경계한다. 일상을 너무 미분하여 접하는 일은 시야가 좁아져 생각의 가지를 좁은 공간에 가두어버리는 결과를 초래한다. 좁아진 생각은 감성만이 가득하다. 감성의 온도가 높아지면, 온기에 취해 사고가 나른해지는 것은 아닐까.. 음미하기엔 두터움이 부족하고, 공감하기엔 여운이 없어 지루하다. 아주 오래 전, 외삼촌이 항상 옆에 두고 읽던 ‘말의 힘’이라는 책이 떠올랐다. 표지 디자인 때문이었다. 언어의 온도라는 제목과 디자인에서 말의 힘을 상상했던 내 잘못된 기대가 문제였다. 베스트셀러여서 구입한 것은 아니었으나, 인기있는 책은 시간이 조금 지난 뒤 읽어야 한다는 평소의 지론을 배반한 것 역시 조금은 후회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