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잘 쓰는 것은 아니지만, 읽고 나서 단 한 줄도 독후감을 남길 수 없었던 소설은 최은영 작가의 전작 소설집 ‘쇼코의 미소’였다. 소설 안에서 풍부하게 펼쳐지는 순전한 여성적 감각의 흐름은 중년 남성인 나로서는 절대 닿아 볼 수 없는 침범 불가의 영역이었다. 섬세한 감정의 표현 역시, 내가 무어라 말한다는 것은 쓸데없는 군더더기를 붙이는 일이었다. 이해하되, 새로운 세계에의 경험 같았다. 바라보되, 노력해서 닿아야 할 목표점 같았다.
이번 소설집 역시 마찬가지이다. 여성의 시선과 경험에서 드러낼 수 있는 소재와 관계들이 가득하다. 섬세한 여성의 시선으로만 글로 만들어낼 수 있는 묘사와 문장들이 가득하다. 마치, 섬세하고 깊은 시선을 가진 여성들이라야 이 정도의 소설을 써 내려갈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 같다. 지극히 여성적인 입장에서 세상을 이야기하고 그것을 남성과 여성 모두에게 이해시킨다.
효진이를 둘러싼 가부장제와 남성 우월적 환경은, 그럴 수 있을 거라는 이해를 하면서도 설정이 너무 극단적이기에 불필요하게 마음이 불편해진다. 겨우 3주간 데이트를 했던 일레인을 보기 위해 비행기를 타고 아일랜드로 가는 랄도의 철없음에서, 작가는 남자들의 찌질함도 잘 이해하고 있다는 생각을 해 보았다. 마치 홍상수 감독의 영화처럼 말이다. 싸이월드, 프리챌 등등의 등장은, 작가와 동시대를 살아온 사람들의 향수를 은은하게 띄운다. 그리고, 소설마다 등장하는 여자와 여자의 관계 안에서, 내가 경험해보지 못한 관계 역시 많은 사람들이 평범하게 경험한 것들을 주고받는다는 사실을 나직하게 묘사한다.
소설의 압권은 관계 안에서 흐르는 감정의 묘사들이다. 살면서 느끼는 감정들, 그것을 어떻게 말로 드러내고 글로 표현할 수 있을까 잠시 고민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내 포기한다. 굳이 말이나 글로 드러내지 않아도 되는 상황들이 대부분이고, 그런 고민들은 대개 아주 잠깐 스치기 때문이다. 그런데, 작가는 그런 사소하면서도 표현하지 못했던 감정들을 기어이 글로 묘사해 낸다. 관계 안에서 흐르는 감정이 소설의 살과 뼈대가 됨을 흥미롭게 바라보면서도, ‘아, 내가 언젠가 느꼈던 뭐라 하지 못할 그 감정을 이렇게 표현해내는구나.’ 하는 감탄을 자아낼 수밖에 없다. 묘사는 깊이와 세밀함을 담고 있으면서도 담담하면서도 간결하다. 단지 문장 하나에서, 내가 드러낼 수 없었던 감정이나 느낌들이 팝콘 터지듯 존재를 불쑥 드러낸다. 작가는 감정 묘사의 뛰어난 마법사이다.
독후감은 여기까지이다. 여성적 감성의 깊고 너른 바다 앞에서 나는 빠져들지 못하고 바라본다. 바다는 자체로 해석이 필요 없는 거대한 존재이다. 그 안에 무엇이 담겨있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남성 독자로서 이 소설을 읽는 일은 그러하다. 발을 담그지 못하고, 몸을 내던지지 못하고 바라만 보는 바다를 보는 기분.. 존재하고 있음을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다시 들여다보고 이해를 받아들여야 하는 작업. 오로지 작가의 힘이라고 말하고 싶다. 부드럽고 나직하고 단단함, 세상 모든 현상과 말들을 넘어서 여성이라는 존재의 본모습은 이런 것이라고 말하는 소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