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일은 언제나 간호사와 함께 이루어진다. 수련시절에는 병동에 가면 언제나 간호사들이 있었고, 각자의 주어진 업무에 분주한 모습이었다. 종합병원의 외과과장 시절에도 외래 진료실과 중환자실, 그리고 병동에서 언제나 간호사들과 대화를 주고받으며 환자를 돌보았다. 그리고, 현재 개인의원의 외래 진료실에서도 언제나 접수실을 중심으로 내부를 분주히 돌아다니며 환자를 돌보고 업무를 수행하는 간호사들과 함께 진료한다. 의료는 전문인력들을 중심으로 구성된 시스템 아래에서 이루어지는 행위이기에, 의사와 간호사를 포함한 다양한 의료인들이 언제나 함께 존재한다. 각자가 따로 존재해서는 역할을 수행할 수 없는 서로 의존적인 관계이다.
병원에서 이루어지는 일들, 그 안에 머물러야만 하는 사람들을 바라보는 시선은 대부분 의사의 입장에서였다. 주치의의 입장에서 환자가 입원하고, 한동안 머물며 치료를 받고, 퇴원을 하거나 마지막 숨을 쉬기까지의 모습을 이야기했다. 그들을 보는 시선, 그들과 주고받은 말들, 그리고 느낌들은 언제나 의사의 말과 글을 통해 서술되었다. 의료시스템의 정점에 서 있기에, 의사들의 글은 언제나 내려다보는 시선이었다. 상대와 동등해지려 애써도, 어쩔 수 없이 시선은 점점 아래를 향할 수밖에 없다.
병동은 언제나 환자들의 공간 중심에 존재한다. 그 안에서 분주하게 병실을 오가고 환자에 닿는 사람들은 간호사들이다. 사실, 환자들을 가장 가까이서 볼 수 있는 의료인이다. 병동에서는 8시간마다, 중환자실에서는 1시간마다 활력징후를 체크하고 시간이 정해진 약을 챙겨주는 일만으로도 간호사는 환자의 가장 가까이에 위치한다. 그러기에 간호사의 시선은 거의 같은 높이로 마주한다. 마주하는 시선에서 나오는 말과 쓰이는 글 역시 더 가깝고 균형감이 살아 있다. 이 책을 읽는 데 어렵지 않고 막힘이 없었던 것은, 나 역시 의료인으로 거의 같은 공간에서 생활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더 중요한 이유는 시선의 기울기가 작기 때문에, 더 가까이에서 바라보고 공감하는 느낌 때문이다. 환자와 병원을 바라보는 의사로서의 시선과 간호사로서의 시선은 분명한 차이가 존재한다. 이 책은 그러한 시선의 차이를 느끼게 하고, 작은 기울기나 동등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일은 얼마나 상대에게 다가갈 수 있는 일인지를 깨닫게 한다.
간호사들은 언제나 힘들어했다. 환자를 돌보는 병동 업무와 병원행정의 일부를 담당해야 하고, 책에서 나오듯 여러 강연이나 모임에 동원되어야 했다. 내가 있었던 병원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 책에 소개된 간호사들의 고충과 노고는, 종합병원에서 근무한 의료인들이라면 어렵지 않게 공감할 수 있는 내용들이다. 그리고, 그런 부조리나 고충들은 아직 온전히 고쳐지지 않고 있다. 2018년 현재 간호사 이직률은 평균 15.5%에 이르는데 이는 다른 병원 내 직종 이직률의 2.3배에 달한다. 이 중 1-3년의 저연차 간호사의 비율은 66%이다. 통계가 드러내는 이러한 사실은 간호사 업무환경의 고됨과 열악함을 그대로 반영한다. 그리고, 이 책의 저자인 간호사는 그런 현실을 바꿔보려 노력했다가 매너리즘의 깊은 뿌리와 병원 내 권력의 무관심에 절망하며 20년이 넘도록 일했던 병원을 그만둔다. 권위에 의존한 채 철저한 보수적 분위기를 유지하고, 사명감을 내세워 희생을 강요하는 뿌리 깊은 부당함이 언제나 존재하는 곳이 병원이다.
20년이 넘도록 중환자실을 비롯한 거대한 3차 병원 시스템에서 일해 왔던 저자를 만나면 의사와 간호사로서 동등한 악수와 대화가 가능할까? 조금은 자신 없어졌다. 의료시스템의 상위에 위치한 의사의 입장이지만, 치열하고 지극히 현실적인 공간에서 오랜 시간을 버텨오며 경험으로 축적한 간호사의 노련함을, 같은 의료인으로서 더 존중해 줄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처방을 내고 적극적인 치료를 했던 주치의로서 활동했지만, 어쩔 수 없는 시선의 기울기와 거리감을 극복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그저, 고생하셨다고, 수고하고 어려운 일을 오랜 시간 감내하셨다고 마음으로 다독이고 존중하는 것뿐이다. 내가 직접 들어 알고, 은연중에 느꼈던 간호사의 복잡다단한 현실이 이 책 안에 고스란히 녹아들어 있었다. 수고하셨다고 마음의 박수를 치면서, 나는 같은 의료인으로서 함께 하려 했었는가를 잠시 되돌아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