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전영웅 Oct 22. 2019

[독후감] 어느 언어학자의 문맹 체류기

  내가 언어가 다른 문화권에 들어가 가장 답답했던 순간은 서점에 들어설 때였다.  교토의 ROHM theater 옆 스타벅스와 한 공간을 쓰고 있는 츠타야 서점과 타이베이의 송산문화원구 안의 서점 안에서 느꼈던 철벽 같은 암담함은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마치 어둠 속에서 길을 더듬으며 출구를 찾아야 한다는 절박마저 느껴졌다.  영어를 잘하는 것은 아니지만, 영어권 환경에서는 내가 읽었던 번역서의 원서를 보면 반가움이 느껴졌다.  그런데, 일어와 중어는 도저히 그럴 수 없었다.  책을 사러 서점에 들른 것은 아니었지만, 저 안을 들여다볼 수만 있다면 내가 바라던 책 몇 권은 나올 텐데 하는 그 아쉬움..  활자를 읽어내지 못해 겪어야만 했던 문맹은 그런 것이었다.  


  다른 문화권에 있는 것과 읽는 것은 겹치는 부분이 있으면서도 많이 달랐다.  있다는 것은 ‘사람 사는 곳은 어디나 다 비슷하다’는 신념 하나로 버틸만 한 경험이었다.  먹어야 한다면 주문을 하면 되었다.  어설프나마 영어로 주문하고, 영어를 못 알아들으면 몸을 써서 표현하면 통했다.  내가 가 본 곳들은 전부 어느 정도의 산업발전이 이루어진 곳이라 그런지 버스를 타고 택시를 타고, 아니면 자동차를 렌트해서 다니며 먹고 잘 수 있었다.  필요한 건 카드나 그 나라의 화폐였다.  있다는 것이 가능한 것은 어쩌면 자본주의의 발전에 기인한 것인지 모른다.  그러나, 읽는다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  그 나라의 언어 아래 영어 주석이 없다면, 나는 완벽하게 눈 뜬 봉사 신세였다.  요즘엔 스마트폰으로 그런 문제 역시 다방면으로 해결할 수는 있지만, 스마트폰의 도움을 배제한다는 전제 하에 그 나라의 언어를 읽어야만 한다면, 나는 어쩌면 여행 같은 건 진작에 포기하고 살았을지 모른다.  

  언어에 능통하지 못한다는 것은 세상을 읽을 수 없다는 의미이다.  누군가 번역이나 해석을 해 주지 않는다면, 나는 언어가 다른 사회나 문화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이방인이자 소수자가 되어버린다.  정치나 사회의 이해는커녕, 동네 사람들의 소소 잡다한 정보마저도 나를 철저하게 소외시킬 것이다.  소외는 존재를 위험에 빠뜨린다.  최근에 들리는 외국인 노동자들의 사망이나 사고 소식이 가볍게 다루어지는 현상은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언어를 모른다는 의미의 문맹은 이렇게 심각하고 무겁다. 


  다행히, 이 책의 주인공은 그 정도의 문맹을 겪지는 않는다.  일정한 자격으로 중어권 문화에 들어가 일정한 지위의 일터와 주변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문맹 체류라 하지만, 본인이 알아서 간단한 문장 정도는 익혀 여기저기 다니는 노력을 보여준다.  문맹 체류라기보다는, 언어를 알지 못한 채 중어 문화권에서 살아보는 일종의 생존 체험기 같다.  


  몇 년 전, 상해에 갔을 때 느낀 어떤 감정이 떠올랐다.  난징동로와 서로를 다니며 느꼈던 번화와는 달리, 고층 호텔방에서 내려다보이던 넓고 낡은 가난의 풍경들, 그리고 골목마다 배치되어 있는 경찰버스와 그 위로 달려있는 사방을 감시하는 카메라들..  어쩔 수 없이 그런 것들만 보는 내 삐딱한 성정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대번에 그런 것들에 질렸다.  최근의 홍콩사태와 맞물려, 나는 중화권 여행에 대한 기대를 거의 접어버렸다.  그러나, 문맹 체류자는 그 안에서 의미를 되짚어 볼 만한 곳들을 소개하며 위트있게 서술해 낸다.  언어학자의 지식을 나름의 위트로 잘 버무려 시선이 이끌어내는 생각 위에 살포시 얹는다.  상해의 경험을 서울과 제주에서의 기억에 연결하여 입체적으로 생각을 서술해낸다.  말과 생각을 위해 이제껏 저축해두었던 머릿속 재료들을 적절하게 꺼내어 마찰 없이 유연하게 굴려낸다.  이것은 문맹 체류자의 분투기가 아니라, 여행을 한다면 이렇게 해야 한다는 적절한 깊이의 여행 안내서 같은 느낌이다. 


  문맹이라는 단어가 조금은 과하게 쓰인 건 아닌가 생각한다.  물론, 좀 더 자극적인 것에 열광하는 세상이라 책 제목으로 쓰였을 것이다.  환대라고 하기엔 좀 그렇고 적어도 냉대는 없는 이국문화 안에서, 글쓴이는 생각의 매력을 발산하고 경험의 재미를 만들었다.  타인의 생각과 경험에 공감하고 재미를 즐길 수 있음은 감사한 일이다.  그런데, 왠지 문맹이라는 단어의 역치가 너무 높아진 것은 아닌가 생각이 남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독후감] 할망은 희망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