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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영웅 Dec 22. 2019

[독후감]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

  글이란 무엇인가.  써야 할 글이 마땅치 않을 때, 나는 문득 이 질문을 던진다.  본질을 겨냥하는 질문은 말문을 막히게 하는 힘이 있다.  질문에 답이 없다면 그것으로 상황은 유리하게 정리된다.  글은 쓰는 것이라는 대답이 돌아오면 ‘쓰는 것은 무엇인가.’라고 다시 묻는다.  그러다 결국 상대방의 손에 들린 머그컵이 내 이마를 향해 날아오는 일이 벌어질 수 있겠지만, 어쨌든 이마의 작은 상처 하나로 상황은 나에게 유리하게 정리될 수 있다.


  노트북을 사 달라고 조르는 아들 녀석에게 ‘노트북이란 무엇인가.’라고 질문하려 했었다.  이제 초등학교를 마칠 나이의 녀석에게 그런 질문을 던진다는 건, 노트북을 사주지 않겠다는 뜻과 다르지 않다.  아니면, 엄마 키를 훌쩍 넘어서고 배 둘레가 나와 비슷해진 육중한 몸으로 노트북을 사 줄 때까지 벌일 육탄전을 감내하겠다는 의지이다.  노트북의 본질도 모르는 녀석에게 노트북을 사준다는 것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나 자신에게 잠시 고민했다.  이내 고민을 접고 모든 귀찮음을 포기한 나는, 몇 가지 다른 질문과 조건을 달아 녀석에게 노트북을 장만해 주었다.  본질에의 질문은 의지의 확고함을 드러내지만, 질문을 포기하는 순간 세상은 아늑하고 포근하게 변화한다.  자본주의에의 비판의식과 본질에의 고민 따위 집어치우고, 마트에 들어가 큼직한 카트를 양 손으로 미는 순간 소비의 환락과 편리의 아늑함이 내 몸을 부드럽게 감싸는 것과 비슷하다.

  그럼에도 나는 ‘글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포기하지 않는다.  아니, 좀 더 정확하게 말해서, ‘내가 쓰는 글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수시로 던진다.  답은 없었다.  주제도 목적도 내용도 무엇 하나 분명치 못하고 흐릿하지만, 끊임없이 쓰는 수밖에 없었다.  만들어진 글이 엉성해도,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분명치 않아도 나는 쓸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글의 쓰레기를 꾸준하게 만들다 보니, 어느새 쓰레기 산이 되어 있었다.  다행인 것은 종이에 쓰지 않아 썩는 악취가 나지 않고, 신용카드 두 장 크기의 작은 외장하드에 자그맣게 담겨 누군가의 보행을 방해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내 글이 내가 사는 공동체 구성원들을 힘들게 하지 않으니 다행이라는 마음으로, 나는 글을 계속 쓸 것이다.  어설프고 엉성하지만, 그것이 내 정체성을 구성하고 다듬어 나를 훈련시키기 때문이다.  


  커피 한 잔에 오랜 시간 동안 눈치 안 보고 자판을 두드릴 수 있는 집 근처 카페에 앉아 열심히 글을 쓰고 있는데, 옆 계단에서 배우 정우성 씨가 특유의 미소를 지으며 나타나 나에게 다가왔다.  여기서 자신과 빼닮은 누군가 열심히 글을 쓰고 있다길래 궁금해서 와 봤다는 것이다.  반가운 마음에 지금 쓰고 있는 문장들을 조금 보여주니 약간 표정이 굳어지면서, 이런 애매한 글 따위 집어치우고 자기랑 같이 티브이에 나가자고 했다.  나는 티브이에 얼굴을 드러내도 괜찮을 만큼 당신과 빼닮은 것은 사실이지만, 나는 웃을 때 눈이 사라지고 당신처럼 입꼬리가 매력적으로 올라가지도 않는다며 사양했다.  그러자, 정우성 씨는 작은 한숨을 쉬더니 그럼 할 수 없다며, 자신과 닮은 사람은 맞으니 글 좀 잘 써서 두 사람의 이미지에 긍정적인 기여를 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내 어깨를 두드리고는 올라왔던 계단으로 사라졌다.  고민은 ‘어떻게 하면 정우성 이미지에 기여하는 글을 쓸 수 있을까.’로 갑자기 바뀌어 자판을 두드리던 손을 잠시 멈추었는데, 사라졌던 정우성 씨가 갑자기 다시 나타나서는 ‘그런 글을 기다리느니 내가 당장 도플갱어 같은 당신을 없애버리는 것이 더 낫겠소.’ 라며, 영화 비트에서 보여주었던 날렵한 주먹질로 내 턱을 후려갈겼다.  갑자기 눈 앞에 카페 천장이 펼쳐지더니 우측 뒤통수로 무언가 둔탁한 것이 부딪히는 느낌이 들며 내 시야는 어두워졌다.  그러고 나는 꿈에서 깨었다.  자판 위로 침이 흐르지 않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입가를 추스르고, 나는 두드리던 자판을 이어 두드리며 글을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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