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는 장마라고 하지만, 비가 거의 오지 않는 마른장마였다. 날이 흐리기만 해서, 덕분에 아빠는 하루에 잠깐씩 텃밭에 들어가 잡초를 뽑을 수 있었다. 텃밭 안의 잡초가 거의 마무리가 되어 갈 무렵인데, 오늘은 비가 내린다. 장마라고 하면 비가 와야 한다. 그래서 반갑다. 좀 더 시원하게 내려줬으면 좋겠는데, 바람에 날리는 정도로만 오고 있다.
이번 주말이면 너와 엄마가 집으로 온다. 아빠는 조금 설레고 있다. 너를 보는 일도 엄마를 만나는 일도 기대가 된다. 그전에 아빠는 혼자 있는 시간을 마무리해야 한다. 네가 이해할 수 있을까? 사람은 가끔은 혼자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 너와 엄마가 곁에 없다는 일은 여러모로 불편하고 외롭지만, 혼자 있기에 느끼고 깨닫고 즐길 수 있는 일들이 있다. 아마도 아빠는 오늘이 혼자 있는 시간을 제대로 보낼 수 있는 마지막 날이 될 것 같다. 비가 오니 마당일을 할 수도 없다. 그래서 오늘 아빠는 집을 조금 일찍 나서서, 사람이 없을 때 혼자서 조용히 감상하고 싶었던 클림트, 빛의 벙커전을 보러 나서려 한다.
집에 손님들이 왔을 때, 내복 차림으로도 아무렇지 않아 했던 네가, 어느 날부터 입고 있는 옷에 신경을 쓰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아빠는 이제 좀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눠야 할 때가 시작되었구나 생각했다. 그 이야기들은 주로 인간에 대한 이야기이다. 네가 굳이 노력하지 않아도 빠져들게 될 너만의 세상, 그 속에 존재하는 너의 자아에 대해서 이야기해야 한다. 그리고, 너를 둘러싼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해야 하고, 이성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해야 한다.
조금 어려운 말이겠다. 네가 사람 가득한 세상 안에서 잘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은 끊임없이 너 자신을 돌아보는 것이다. 사람을 이해하는 가장 기본은 너 자신을 먼저 아는 것이다. 너 자신을 안다는 것은 곧 솔직함이기도 하다. 너 스스로를 알아야 다른 이들을 이해할 수 있다. 이제 곧 너만의 세계를 고집하는 사춘기를 통과할 것이다. 본능이 먼저 너의 세계를 고집하는 그 시기에도, 항상 너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으며, 그것이 합리적인가를 뒤돌아보아야 할 것이다.
이성의 문제도 그렇다. 우선은 너 자신부터 잘 알아야 상대를 이해하고 존중해 줄 수 있다. 이성에게 배려는 아주 중요한 일이다. 남자와 여자는 다르다. 그것을 먼저 받아들이고 배려하는 것이 좋은 이성관계의 시작이다. 그러자면, 어떻게 다른 것인지 분명하게 알아야 한다. 내가 하는 말과 행동이 상대를 불편하게 만드는 지도 생각해야 한다. 서로 좋아한다는 본능의 감정은, 너 자신을 알고 존중과 배려라는 가장 기본의 인간관계를 바탕으로 자연스럽게 발전하는 것이다. 그러니, 네가 친구들과 서로 불편함 없이 잘 어울리며 지내다 보면, 그 관계에서 이성친구를 만나게 되고, 좋아하는 감정은 친구관계를 바탕으로 발전할 수 있다.
글로만 말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그러니, 네가 오면 서로 나누어야 할 이야기가 많은 것이다. 게다가 아빠는 구체적이기보다는 의미와 전체를 설명하기 좋아하는 사람이라 네가 더 어려울 수도 있겠다. 모든 관계는 자연스럽게 다가온다. 네가 자연스러운 관계를, 완전하지는 않겠지만 여유 있게 받아들일 수 있다면, 친구든 이성이든 너는 좋고 아름다운 관계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더 자세한 이야기는 집에 오면 하자꾸나. 이번 편지는 아빠가 보아도 좀 어렵다. 말과 글이 다른 모습이기도 하다. 아니면, 아빠의 부족한 설명 능력으로 욕심이 과했던 탓인지도 모른다. 어째되었든, 직접 보고 이야기할 수 있는 날이 머지않았다. 무사히 돌아오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