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의 초등학교 6학년 겨울은 그다지 생각날 게 없는 시간이었다. 문득, 지금 너의 나이 때 아빠는 무얼 하고 있었나 궁금해져서 기억을 떠올렸는데, 떠오르는 기억이 별로 없다. 그저 그런 기억들 뿐이다. 한 가지, 아직도 잊히지 않는 하나가 있다면, 할머니가 아빠에게 중 1학년 영어 교과서를 주고는 방학 내내 교과서를 통째로 외우게 했던 일이다. 영어 발음기호 쓰는 법과 함께 말이다.
전주 한복판의 오래된 동네 안으로 골목을 따라 들어가면 끝에 세 개의 대문이 나오는데, 그중 왼쪽 대문이 할아버지의 집이었다. 가운데 집은 인쇄소를 겸하는 집이었고, 오른쪽은 아빠와 친한 친구가 살았던 집이었다. 그 친구는 아빠가 5학년 즈음에 다른 동네로 이사를 갔는데, 친구의 아버지는 고등학교 영어 선생님이셨다. 아빠가 6학년 때엔 지금은 기억나지 않는 누군가가 사는 집일 뿐이었다.
당시의 초등학생은 숙제만 잘 마치면 종일 노는 시간이었다. 종종 학원에 가는 친구들도 있긴 했는데, 잘 사는 동네는 아니어서 그런지 대부분의 시간을 헤어지는 일 없이 동네 아이들과 해 질 녘까지 놀았다. 지금은 2차선 아스팔트 도로가 뚫려서 할아버지 집이 있던 자리는 반토막이 나버렸는데, 당시 놀던 골목의 부분이 남은 자리를 찾아가 보면, 골목의 폭이 아빠의 양 어깨 너비를 간신히 넘기는 정도이다. 그런 좁고 긴 골목에서 아빠는 동네 친구들과 함께 숨바꼭질도 하고, 사방치기도 하고 술래잡기도 하며 놀았었다. 분명 그렇게 놀았는데, 그 좁은 골목에서 그렇게 놀았다는 사실이 무척 신기하기만 하다.
골목은 미로까지는 아니었지만 꽤 길고 가지처럼 골목 안 골목이 많았다. 놀면서도 어디 이상 나가면 안 된다는 규칙을 세워야만 했었다. 종종걸음으로 집에서 골목을 벗어나는 일도 시간이 좀 걸리는 일이었다. 걸어서 5분 남짓 입구로 나가면 양 옆으로 지금의 편의점 격인 작은 구멍가게가 있었다. 둘 중 한 집은 동네 할머니들의 사랑방 같은 곳이어서 낮부터 막걸리를 한 잔씩 들이켜고 계셨다. 골목 동네를 관장하는 작은 복덕방이 있었고, 골목 입구 구멍가게 옆으로는 달마다 발행되는 여러 잡지들이 모이는 지국이 있었다. 2차로 맞은편은 넓은 모래터를 가진 벽돌공장이 있었고, 너의 할아버지는 처음으로 장만한 프레스토라는 자가용을 그 모래터에 주차시키곤 하셨다.
골목 반대편으로는 10여분 남짓 걸어야 끝이 나왔고, 골목을 나서면 맞은편으로 호떡을 파는 포장마차가 있었다. 그 뒤로는 작은 성당이 있었지. 할아버지가 밤에 일을 나가시면 가끔 천 원짜리 한 장을 쥐어주셨는데, 그러면 아빠가 골목을 따라 달려 나가 포장마차에서 파는 한 장에 오십 원짜리 호떡을 스무 장 사서 식기 전에 집으로 달려 들어왔었다. 밤 9시 뉴스가 한창 나오는 시간에 고모들과 할머니와 둘러앉아 그 호떡을 먹었었다.
새벽 5시 반이면 바깥에서 종소리가 났었다. 그 종소리에 한 겨울 새벽에 깨서 연탄재가 가득 담긴 비료포대를 들고 골목이 갈라지는 곳까지 나서면 쓰레기 리어카가 서 있었다. 종소리는 청소부 아저씨가 골목 안까지 들어오며 울린 것이었지. 갑자기 기억이 나는구나. 포대가 무거워 질질 끌다시피 가져가며 추위에 덜덜 떨었는데, 삼거리 골목 한가운데 아빠 키보다 높은 쓰레기 리어카가 어둔 새벽에 누런 가로등 불빛을 받으며 서 있었다. 불빛 안으로 하얀 눈이 소소히 내리고 있었어. 아빠가 건넨 포대를 청소부 아저씨가 받아다 리어카 안으로 비우고 넘기면 먼지가 자욱 일었는데, 가로등 아래로 일어나는 먼지와 흩날리는 눈송이들이 겹치며 뒤섞였다. 마치 단 하나의 조명으로만 비추고 있는 연극무대 같았어. 무대 위에서 동네 어른들은 저마다의 포대를 들고 비우고 말없이 다시 돌아가고 있었다. 아빠도 잠시 멈추고 그 광경을 보다가 추워서 얼른 뛰어들어갔었다.
너의 지금의 추억은 무엇일까. 그 먼 곳에서, 사계절 없이 덥거나 좀 덜 덥거나 한 동네에서, 너의 추억은 어떻게 쌓이고 있을까. 아빠는 너의 추억 안에서 어디쯤 자리하고 있을까. 생각하다 보면, 이렇게 멀리 오래 떨어져 있다는 사실이 두려워진다. 너의 추억 안에 아빠의 자리가 존재하지 않을까 말이다. 제주는 겨울이 시작된 듯하다. 그리 춥지는 않지만, 거실엔 등유난로와 코타츠를 배치해 두었다. 너도 좋아했던 에디 히긴스라는 재즈 피아니스트의 음악이 겨울의 시작에 너무 잘 어울리고 있다. 엄마가 이틀 후면 너에게 간다. 그간 고생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