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21.

제주에 집을 지었다.

by 전영웅

제주에 내려왔는데 아파트 생활을 지속한다는 건 내가 생각하는 삶과 어딘가 어울리지 않았다. 마당이 있는 주택에서 살고 싶었다. 그것이, 제주에서 꾸리는 내 삶과 잘 어울릴 것 같았다. 살던 아파트의 풍광이나 활용이 나쁘지는 않았다. 그러나, 마당에 텃밭을 두고 땅을 딛고 사는 꿈은 쉽게 포기되지 않았다.

제주에서 산 지 4년을 넘기고 있을 때, 우리는 그 꿈을 위해 적극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우리가 살던 아파트는 병원의 관사로 활용되고 있었는데, 병원이 계약을 종료했고 이제는 우리가 주인과 직접 연세 계약을 맺어야 했다. 일 년간 계약을 연장하며 아파트 연세를 지불하고 우리는 바로 땅을 알아보았다. 장인어른 장모님까지 내려오셔서 근교의 부지를 수소문해 본 결과 지금 내가 살고 있는 땅이 위치가 나쁘지 않았고 가격 면에서도 가장 저렴했다. 밭이었던 땅을 사분하여 내놓은 가장 안쪽 자리를 이제까지 모아둔 돈을 모두 쏟아부어 구입했다. 이제 주택건축을 해야 했는데, 당시의 건축 시세에 맞추어 대략의 견적을 내어 보았고, 은행 대출을 포함하여 끌어들일 수 있는 자금을 예상하고 이자를 계산하니, 아파트 연세로 지출해야 하는 비용보다 훨씬 저렴했다. 따라서, 건축은 최대한 빨리 시작하는 것이 낫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우리는 바로 설계와 시공업체를 알아보고, 아파트 계약 기간 내에 준공 완료한다는 목표로 2층 주택 건축을 시작했다.

당시엔 농지를 구입하면 택지로 전환하기 전 1년 정도 농사를 지어야 한다는 규정이 생기기 전이었다. 제주의 급격하고 복잡한 변화가 본격적으로 휘몰기 직전에 땅을 구입해서 집까지 지은 일은 지금 생각해도 다행이었고 잘한 일이었다. 1년을 의미 없는 농사일로 보내지 않아서 다행이기도 했다. 여하튼, 두 달 이상의 설계기간을 거치고 6개월 정도의 공사기간을 거쳐 우리는 화이트데이라는 3월 14일의 이른 봄날, 입주 이사를 했다. 이사를 마치고, 나는 마당의 일부를 돌로 경계를 놓아 텃밭을 만들었다. 마당엔 잔디가 깔리고, 사적인 공간을 위한 돌담이 들어섰다. 걸어서 하던 출퇴근은 이제 차가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 되었고, 당시 다니던 종합병원은 퇴사를 한 달 정도 남겨두고 있었다.

집을 지으면서, 나는 엉뚱하게도 근원적인 고민에 빠져버렸다. 내가 집을 짓는 일은 옳은 일인가에 서부터 고민은 시작되었다. 나 스스로 집을 짓지 못하고, 아무리 집을 지어도 집을 가질 수 없는 사람들에게 나의 집을 맡기는 것은 옳은 일인가 고민했었다. 인간이 누릴 수 있는 편리의 한계, 소유의 적정성에 대한 고민이 하필 그 당시에 팽배해지고 있었다. 그런 면에서 보면 나는 정말 현실감 없는 한심한 인간이기도 하다. 당시의 고민을 계속 이야기하자면, 고민의 근원은 이반 일리히의 이야기에서 정점을 이룬다.

‘이반 일리히는 1984년 영국 요크에서 열린 영국 왕립 건축가 협회 창립 150주년 기념 강연에서 인간에게서 망각된 정주의 개념을 이야기한다. 정주란 인간이 한 지역에 머무르며 살면서 뿌리를 내리는 과정이라 말한다. 이 과정은 단지 사람이 한 자리에 머무름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정주란 자신이 살아갈 집이란 공간과 그 위치를 스스로 정하고 만들어가며, 공간 내외에서 필요한 것들을 스스로 구하거나 만들거나 타인과 교류함으로써 갖추는 능력을 말한다. 정주의 공간이라는 의미에서 집은 공간 내에서 살 사람에게서 최소하고 간단한 살림과 기능을 부여받는다. 즉, 정주의 주체는 살아갈 사람이며, 공간을 구성하고 모양을 내며 구조를 결정하는 주체 역시 공간 안에서 살아갈 사람인 것이다. 그에 비해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정주의 개념을 완전히 망각했다. 집은 이제 정주가 아닌 인간이 머무르는 공간이며, 인간은 집의 구조와 기능에 능동적 의미를 부여하는 능력을 거의 상실했다. 마찬가지로, 집은 살아갈 사람이 짓는 것이 아닌, 전문가라 불리는 사람에 의해 타의적으로 만들어진다. 전문가는 집이라는 콘크리트 공간을 만들어낼 뿐, 정주의 개념을 부여하거나 구조와 기능에의 공감을 형성하지 못한다. 타인에 의해 지어진 집에서 살아갈 사람 역시, 활동과 기능의 면에 있어 집과 공명을 이루기에는 너무도 복잡하고 어려워졌다. 따라서 현재의 집은, 정주의 개념이 아닌 바깥과 구분되는 공간 개념이자 머무름의 의미부여 정도만이 가능한 수동적 개념의 산물이 되어버렸다.’

이런 고민에 푹 빠져버린 채, 앞으로 그만두어야 하는 병원과 새로운 일자리에 대한 고민에 겹쳐 생각 많은 표정으로 하루하루를 지내던 나 때문에, 아내와 장인 장모님이 집을 짓는데 참 많은 고생을 하고 짐을 지셨다. 그래서인지, 집 안팎으로 이런저런 관리를 하다 보면, 짓는 과정에서 나 아닌 다른 이들이 고생했다는 생각 때문에 몸을 더 부지런히 움직이고 신경을 더 쓰게 된다.

이 글을 쓰는 시점은 이 집에서 산 지 2년 반을 넘기고 있다. 아파트와 달리 주택은 사람의 손을 참 많이 요구한다. 전등 하나부터 벽의 곰팡이, 먼지와 해충구제, 냉난방의 비효율까지 어디 하나 평온하게 놓아두기가 어렵다. 주말에 마음 놓고 오랜 시간 나들이를 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게 되었고, 태풍이나 한겨울의 고난을 한 번 거치고 나면 봄날의 나른함은 일종의 사치가 되어버린다. 마당과 텃밭은 또 어떤가.. 초봄에 땅을 뒤엎고 모종을 심고 나면, 그때부터는 텃밭과 마당 곳곳에서 올라오는 잡초들과의 전쟁이 시작된다. 한여름의 뜨거운 태양이 한풀 꺾일 때까지, 주말이면 장갑 낀 손으로 호미를 잡고 집 주변을 앉은걸음으로 돌아야 했다. 그러나, 나는 지금의 생활을 즐기고 사랑한다. 내가 사는 공간을 직접 관리하고 꾸밀 수 있다는 보람이 있다. 진료실에 가만히 앉아 몸을 움직이지 않아 쌓이는 게으름을 해소할 수 있고, 몸을 움직이며 무언가를 한다는 성취가 있어 좋다. 몸을 움직인다는 것은 몸의 활력뿐만 아니라 생각의 다양하고 논리적인 흐름에도 도움이 됨을 직접 느끼고 있다. 공간의 활용과, 내가 사는 공간과 주변의 환경이 상호작용하는 모습을 관찰하는 것도 즐겁다. 때마다의 고민은 삶의 근본과 닿아있어 피로하지 않고, 관리에의 고민은 삶의 보편 기술과 닿아있어 흥미롭다.

내가 사는 집과 공간의 즐거움은 우선 근원적이다. 그것은 현실과 이상 그리고 바람이 적절하게 조합되어 차분하게 안정된 상태이다. 일단은 그것이 전부다. 땅을 매입한 후 시간이 지나며 가격이 급격하게 올랐다는 현실과, 건축비 역시 상승하여 일찍 집을 지은 일이 다행이라는 이야기들엔 조용히 입을 다문다. 나는 주택에서 살고 싶다는 바람을 이루었을 뿐, 자본가치로서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생각해 본 일이 없기 때문이다. 땅값과 집값이 오르는 현실은 한국사회에서는 노동가치를 뛰어넘는 부의 획득 방법이자, 대다수의 고통을 수반할 수밖에 없는 일이다. 땅값과 집값이 오르는 일은 소유주로서는 좋을 수도 있으나, 모든 것들이 동반 상승하는 상황에서는 운신의 폭이 여유로워 지지도 않는다. 그런 현상이 급격하게 휘몰아치는 제주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의 고통과 당장의 욕심에 급급한 졸부들만 늘어나는 모습이다. 거기에 투기를 목적으로 하는 자본들이 유입되어 풍경은 긍정적이지 못한 모습으로 급격히 변하는 중이다. 제주에서의 부의 가치 상승은 대다수 사람들의 고통과 광적인 풍경만 만들어내고 있다. 나는 삶의 터전을 근본적 이유 그대로 받아들이고 생각하고 싶다. 특별한 도움 없이 자력으로 터전과 집을 마련했고, 내 힘으로 직접 관리하며 유지해나가며 집이라는 본연의 의미를 지키고 싶다. 그리고, 스스로 그럴 수 있는 나의 처지에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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