텃밭일기 #45, 20200810

by 전영웅

텃밭은 무성해지고, 먹을 것도 무성해졌다. 고추는 수시로 거두어도 처치곤란 수준이다. 어른이 되었음을 스스로 증명하듯, 진자줏빛 가지가 주렁주렁 매달린 모습이 반가웠다. 늙은 호박은 곳곳에서 무서울 정도로 모양대로 커지며 주변 풀들을 짓눌렀다. 수박은 먹을만큼 커진 두 덩이와 작은 한 덩이가 텃밭 어딘가에서 존재감을 드러냈다. 작은 참외 하나가 달렸다.


장마에 이어 뜨거운 바람이 불었다. 육지는 집중호우로 난리라고 하지만, 제주는 남쪽에서 한라산을 타고 넘어 온 바람이 푄현상에 의해 거세지고 뜨거웠다. 너무 덥고 습해서 집 밖에서 무언가를 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무더위를 핑계삼아 마당에 나서지 않은 지 열흘은 된 듯 하다. 마당과 텃밭 입장에서는 그 시간 만큼의 방치였다. 그래서, 마당을 포함한 집주변은 넉넉한 비와 뒤이은 무더위로 잡초들이 다시 무성해졌다. 마당에는 잔디 위로 줄기를 바짝 올린 잡초들과 잔디와 키를 맞추어 은밀히 퍼지는 잡초들이 곳곳에 보였다. 그것들은 마치 사람을 약올리는 듯 했다. 별 수 없이 몸 좀 놀려야 하지 않겠냐고 말이다. 별 수 없었다. 몸을 놀려야 했다. 다시 장갑을 끼고 호미를 들고, 반려견이 오가는 마당 쪽으로 무성한 잡초들을 거두기 시작했다. 더운 바람이지만 모기는 좀 덜하겠지 했던 기대는 여지없이 무너지고, 나는 모기들의 표적이 되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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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이 아내는 텃밭으로 들어가 먹을 것들을 거두었다. 고추와 가지, 물외와 호박이 널직한 소쿠리에 한 가득 담겼다. 잠깐 거두어들인 것들이 이 정도인데, 사실 우리 한 가족이 먹기엔 너무 양이 많았다. 나는 고추와 가지 대부분을 종이가방에 담아달라고 했다. 출근길에 챙겨들고 병원에 가서 직원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집 입구에서 텃밭을 거쳐 마당과 뒤뜰까지, 몸을 놀려야 하는 공간은 끝이 없다. 그것은 뫼비우스의 띄 같은 시공간적 과제이다. 그러나, 무더위는 과제를 애써 피하게 만들었다. 곧 가을 텃밭 준비도 해야 하는데, 그 때 몰아서 하지 라는 게으름이 생겼다. 우선은 텃밭에서 나온 것들을 가지고 즐겼다. 고추는 일단 매번의 밥상에 올라 장에 찍어먹는 반찬이 되었고, 남은 것들은 다져서 겨우내 사용할 용도로 냉동실에 보관되었다. 수박은 아들녀석의 생일주간에 지인들과 함께 한 통 잘라서 후식으로 먹었다. 빨갛기가 조금 아쉬웠지만, 달기로는 아쉽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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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은 호박은 한여름에 그 용도를 생각해내기 쉽지 않다. 너무 빨리 자라고 무거운 호박 자체도 요리하기가 쉽지 않은데, 나름의 응용을 해 보았다. 우선 배낚시에서 잡은 오징어를 고추장 양념하여 목살과 함께 볶은 다음, 속을 비운 늙은 호박에 집어 넣었다. 그리고, 뚜껑이나 다름없는 부분에는 모짜렐라 치즈로 채웠다. 그대로 오븐에 넣어 넉넉히 익혔다. 호박과 고추장 소스의 오징어 목살볶음이 아주 잘 어울리는 맛은 아니었지만, 잘 익은 호박이 조각으로 잘리며 치즈가 덮인 볶음이 연출하는 모습은 충분히 감탄할 만 했다.


공심채도 잘라서 볶아보았다. 줄기와 잎을 분리하고 굴소스와 어간장으로 볶는 공심채 볶음은 맛은 그럭저럭 괜찮았지만, 수경재배가 아닌 땅에서 기른 것들이라 많이 질겼다. 조금 늦게 거둔 것도 이유가 될 것이다. 아내는 텃밭의 방울 토마토와 바질을 활용해서 발사믹 식초와 올리브오일 양파를 넣고 토마토 절임을 만들었다. 재료 자체만 해도 완벽한 궁합인데, 텃밭에서 직접 거두어 신선한 상태에서 바로 만든다는 어떤 보람이 맛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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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지는 얼마전 중식당에서 먹어 보았던 어향가지 요리가 생각나서, 레시피를 찾아보고 그대로 해 보기로 했다. 가지를 적당한 크기로 잘라 중간에 칼집을 내고, 그 안에 밑간한 다진 돼지고기를 넣는다. 튀김옷을 입혀 기름에 튀기고, 두반장을 중심으로 한 소스를 만들어 튀김에 입힌다. 남은 가지는 적당한 토막으로 잘라 튀김옷만 입혀 그대로 튀겨 가지튀김을 했다. 역시, 텃밭에서 거둔 재료로 직접 요리한다는 보람과 자부심이 맛을 더욱 좋게 했다. 연태 고량주 한 잔 같이 하지 못함이 아쉬울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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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의 중순, 육지의 물난리를 듣는 제주에는 첫 태풍을 앞두고 있다. 무더위와 비바람의 반복 이후로 어떤 절정으로 다가가는 기분이다. 그 안의 일상에서 나는 노동의 버거움과 거두어 먹는 즐거움을 번갈아가며 누렸다. 그리고, 텃밭도 어떤 절정의 지점에 도달한 풍경이다. 태풍이 지나가면, 나는 가을준비를 해야 한다. 이제 끝물인 오이와 수확율이 아주 낮은 토마토를 지주대와 함께 거두어낼 것이다. 올해 유난하게도 비실거리는 콩과 식용으로는 잘 자라지 못하는 공심채를 거둘 것이다. 그 자리에 쪽파와 무와 배추를 적당한 양만큼 심을 것이다. 계획은 이러한데, 결과는 어떨 지 알 수는 없다. 다만, 내가 다시 약간의 머리를 굴리며 몸을 써야 하는 시기가 왔다는 것 만큼은 확실하다. 동시에, 덥다고 게으름을 피워 삽시간에 무성해진 마당과 집 입구와 뒤뜰의 잡초도 정리해야 한다. 공간은 단 한번도 나에게 쉼을 허락한 적이 없다. 넉넉하게 먹을 것들을 건넴으로 약간의 위로만을 전했을 뿐.. 나는 그 사실을 미련하게도 자주 망각한다. 그렇다고 내가 자리한 공간에 불만을 품지는 않는다. 자연 안에 자리한 인간의 당연한 운명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