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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텃밭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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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영웅 Nov 06. 2020

텃밭일기 #53, 20201106

  배추의 초록이 좀 더 짙어지고 한 주가 다르게 잎이 커졌다.  속이 올라오는 모습을 보고, 겉잎을 묶어주었다.  서리태 몇 그루는 초록에 황톳빛이 섞이며 말라가고 있었다.  모두 뽑아서 주차장 마당에 모았다.  막대로 두드려 콩깍지를 터뜨렸다.  검게 잘 익은 것들과 검지만 쭉정이 같은 것들, 그리고 덜 여문 것들이 뒤섞여 후드득 떨어졌다.  모아보니 밥 지을 때 두어 번 넣을 수나 있을까 싶을 정도의 양이었다.  한 그루 남은 귤나무에서도 노랗게 익은 귤을 거두었다.  알이 크고 껍질이 두터워 맛은 별로인 품종이다.  그래도 두었다가 다른 용도로 쓸 수 있을까 싶어, 새들이 먼저 부리로 건들기 전에 거두었다.  배려의 마음으로 몇 개는 그대로 남겨두었다.  맛이 있던 없던 간에, 배고픈 새들은 날아와서 먹을 것이다.  감도 마찬가지이다.  먼저 익은 것들은 새들이 와서 먼저 파 먹거나, 꼭지에 힘이 빠져 아래로 그냥 떨어졌다.  현관 앞을 지저분하게 만드니, 차라리 먼저 따서 창고에서 후숙하는 것이 낫겠단 생각이 들었다.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감들을 하나하나 거두었다.  역시 배려하는 마음으로 새들 먹을 것들은 남겨두었는데, 그게 사다리가 닿지 않는 높은 곳이다 보니 반 정도를 어쩔 수 없이 남겨둔 셈이 되어버렸다.  거둔 것들은 창고 테이블 위에 나란히 놓아 물렁해지기를 기다린다. 

  날이 점점 추워지고, 유리가루처럼 찬란하게 부서지던 가을볕도 이제는 지나간 듯하다.  이맘때 즈음, 배추를 묶어주고 나면 나는 한 해 텃밭 농사가 마무리되는구나 하는 기분을 느낀다.  물론 배추를 묶어주었다고 해서 할 일이 없는 것은 아니다.  고추가 빛을 바래면서도 여전히 꽃과 고추를 맺고 있고, 일본가지는 여전히 푸르다.  바질 역시 점점 추워지는 날씨를 잘 버텨내고 있었다.  더 이상은 거둔다는 단어보다는 정리한다는 단어가 더 어울릴 시기이다.  거둔다 해도 먹잘 것 없거나 몇 개 되지 않는 정도다.  그저, 텃밭의 것들이 추위에 더 마르면 과감하게 뽑아서 뒤뜰에 쌓아 말린 뒤 태운다.  줄기들을 지탱하던 지주대들을 모두 뽑아 모아서, 창고에 보관한다.  텃밭에 남은 거의 유일한 작업이다.  말라버린 호박 덤불들을 치우고, 더운 날 사방으로 뻗은 나무들의 가지들을 정리하면 내년 텃밭을 시작하기 전 까지는 손을 쉴 수 있다.  아쉽기도 하고 다른 의미에서의 기대이기도 하다.


  연작이 가능한 제주에서 텃밭을 계속 일굴 수도 있다.  양파를 심으면 되고, 브로콜리나 콜라비를 심을 수도 있다.  마늘도 있고, 하다못해 쪽파로 빈터를 채울 수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작물들은 농약과 비료가 없이는 한겨울에도 내 것으로 만들지 못했다.  또는 땅이 맞지 않는지 아무리 노력해도 잘 자라지 않았다.  집 주변의 밭에는 브로콜리와 대파 등이 가득하게 자라고 있음에도 내 텃밭은 그저 한 겨울 비우는 이유다.  게다가, 겨울엔 돌아다니며 파치를 줍는 일이 노심초사하며 텃밭을 신경 쓰는 일 보다 훨씬 득이 된다.  결정적인 이유는, 겨울 한 철만이라도 텃밭에 신경 쓸 에너지를 다른 일에 쓰고 싶기 때문이다.

  루틴의 힘은 대단하다는 이야기가 점점 자주 들린다.  별생각 없이 일상을 쪼개어 규칙적으로 살고 있는 나는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내 일상이 루틴의 대표적 모습임을 주변 지인들에게서 확인하게 된다.  생각해보면 하루하루 또는 주나 한 해를 버티며 살 수 있는 것도 내 일상의 루틴 덕이었다.  책을 읽고 글 쓰고 건프라 작업을 한다.  병원을 다녀오고 근력운동과 검도를 일주일에 정해진 횟수 이상 유지한다.  텃밭도 내 루틴의 한 요소이다.  크게는 한 해의 루틴이고, 소소하게는 하루의 루틴이기도 하다.  루틴은 사람을 분주하게 만든다.  시간을 쪼개어 무엇에 투자한다는 것, 그것은 반대로 말하면 하나에 집중하기 어렵다는 의미이다.  꾸준하게 이끌고 나갈 수 있을 뿐이다.  


  겨우내 루틴에서 텃밭을 잠시 내려놓는 일은, 다른 일에 좀 더 시간 투자와 집중을 한다는 의미이다.  그 일은 책 읽기와 글쓰기이다.  날이 추워 바깥활동이나 작업이 부담스러워질 때, 따뜻한 집 안에서 음악을 들으며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일을 좋아한다.  겨울은 그런 나의 루틴에 좀 더 집중할 수 있는 시기인 것이다.  배추를 묶어주고 나니, 이제는 그런 시간을 보낼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내 손을 기다리는 텃밭과 마당의 소소한 일들은 여전히 존재하지만 말이다.  

  올해는 겨울이 조금 일찍 오는 느낌이다.  11월 초에 날이 갑자기 추워지며 텃밭도 빛이 급격하게 바래졌다.  사력을 다해 마지막을 피워내던 호박꽃들도 그 추위에 금세 시들어버렸다.  북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좀 더 부담스러워졌다.  옷도 좀 더 두터워졌다.  당연한 계절의 변화임에도 더워서 어쩔 줄 모르던 날들의 기억이 멀지 않음에 부담은 더 크고 두려움마저 살짝 얹힌다.  그래도 해마다 겪어내야만 하는 계절이고, 그 계절을 나름 즐겨야 한다.  루틴을 정해가며 말이다.  보조주방에서 여름의 무더움을 즐기며 자라던 레몬나무 화분을 볕이 잘 드는 거실 창가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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