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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텃밭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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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영웅 Oct 26. 2020

텃밭일기 #52, 20201026

  주말, 진료를 마치고 퇴근하자마자 고구마를 캤다.  며칠 전 비가 오더니 날이 쌀쌀해졌다.  가을 햇살은 여전히 따가운데, 덥지 않았다.  그 햇살에 기운을 얻어 드러난 내 살갗으로 돌진하던 풀모기들도 이제는 없었다.  마당의 잔디와 반려견의 하얀 털이 가을바람에 살짝 물결이 일었다.  따가운 햇살에 물결의 자잘한 그림자들이 분명하게 대비되며 강렬한 빛가루를 뿌렸다.  눈부시고, 서늘했다.  


  고구마는 벌써 줄기들이 시들고 말라버렸다.  작년보다 좀 이르게 시든다 싶었는데, 생각해보니 올해 고구마는 육지에서 들여왔다는 새로운 품종으로 심었었다.  언제 캐야 하는지 물어보지도 않고 심었더니, 때를 놓친 것 같은 불안이 엄습했다.  별다른 배경지식 없이 게으르게 키우는 텃밭이란 것이 매번 이런 꼴이다.  호미로 판 흙더미 안으로는 느낀 불안 그대로 고구마들이 자라 있지 않았다.  손가락 굵기로 가느다란 고구마들이 몇 개 나오다 말았다.  간혹 덩치가 큰 녀석은 이미 땅에서 썩어 있었다.  그 주변을 굼벵이와 장수지네들이 돌아다녔다.  녀석들에겐 더할 나위 없는 먹거리였을 것이다.  약간의 실망과 나의 게으름을 탓하며 허리를 펴고 일어섰더니 옆집 밭이 보였다.  거기도 땅주인이 고구마를 심어놓았다.  그 땅에는 고구마 줄기가 여전히 생생하고 풍성했다.  역시, 제주의 땅과 기후에 맞는 고구마가 있을 것인데, 나는 그런 기본적인 것도 생각하지 않고 맛있다는 품종으로 심었다가 이런 낭패를 본 것이었다.  작년까지, 우리 텃밭에서 가장 재미를 본 작물이 고구마였다.  생생한 덤불을 헤치고 호미로 땅을 조심스럽게 파면 주먹만 한 굵기의 고구마가 주렁주렁 달려 올라왔던 기억이 생생하다.  줄기도 시들지 않아서, 반찬 삼을 겸 고구마순을 손질하다가 지쳐서 마당 한 켠으로 치워버리기도 했었다.  올해엔, 그런 재미나 기쁨은 사라졌다. 

  대신 늙은 호박이 풍년이었다.  텃밭 곳곳에 황토색으로 큼직한 호박들이 누워 있었다.  늙은호박을 많이 심은 탓도 있긴 했다.  하지만, 올해 호박은 사방으로 줄기를 열심히 뻗더니 여름부터 쉬지 않고 호박을 맺었다.  놔두면 덩치 좋은 호박들이 알아서 자리 잡고 익어갔다.  넘치는 호박을 어쩌지 못해 지인들에게도 나눠주고, 수시로 요리로 해 먹었다.  호박죽도 해 먹었고, 해물이나 돼지고기를 고추장 양념에 볶아 속을 비운 호박 안에 담아 넣고 오븐에서 익혀 먹었다.  그래도 텃밭에는 황토색 덩치들이 계속해서 눈에 보였다.  고구마로 실망한 마음은 넘치는 호박들에 위안을 받았다.  눈에 보이는 녀석들을 꼭지를 꺾어 거두었다.  호박은 한 해의 막바지에 줄기를 좀 더 늘이고, 연신 꽃을 피우며 처절하게 본능대로 몸부림 중이었다.  그래서, 노란 호박꽃에는 꿀벌들이 쉬지 않았고, 곳곳에 초록의 호박덩이들이 서둘러 덩치를 키우고 있었다.  나는 적당히 못생긴 호박 하나를 집어들고 펌킨 카빙을 했다.  때마침 10월의 하순, 할로윈이라는 서양 명절 기간이기도 하니, 넘치는 호박 중 하나를 골라 처음으로 시도해 보았다.  날이 적당히 선 주머니칼의 날을 호박 꼭지의 주변으로 박아 넣어 모자를 만들었다.  모자를 열고, 안의 씨앗들을 거두었다.  그다음, 옆면에 칼날로 밑그림을 그린 다음, 밑그림 선대로 날을 박아 넣어 가며 눈을 만들고 입을 만들었다.  안에 간이 양초를 넣고 모자를 다시 씌운 다음, 반려견 녀석의 집 위에 올려두었다.  나름 밤 풍경을 운치 있게 연출했다.  반려견 녀석은 긴장할까 싶었던 기대와는 달리 심드렁 내지는 관심 없는 모습이었다. 

  시들어 말라버린 고추들과 가지들을 정리했다.  지주대를 뽑고 뿌리째 뽑아 뒤뜰에 쌓았다.  아직 시들지 않은 고추는 아직도 꽃이 피고 있었다.  일본가지는 여전히 진자줏빛으로 생생했고, 작지만 싱싱한 가지들을 맺어내고 있었다.  바질은 꽃대를 한껏 세우고 한 해의 마지막을 정리하고 있었다.  이미 익어 떨어진 씨앗은 메마른 땅 위로 싹을 내고 있었다.  

  작년에 심은 땅콩은 미쳐 거두지 못하고 땅에 남겨진 것들이 알아서 싹을 틔우고 자랐다.  그것들을 거두려 흙을 살짝 파보니 아직 덜 여물어 있었다.  다시 흙을 덮어 주었다.  서리태 콩 몇 그루는 아직 초록을 잃지 않아 완전히 여물어 거두려면 시간이 필요해 보였다.  배추는 겉잎을 모아 묶어주어야 싶게 넉넉히 자랐다.  그러나 아직 속이 덜 올라와 한두 주 있다가 묶어줄까 싶다.  무 역시 알아서 잘 자라고 있었다.  딸기 덤불이 날이 추워지니 유난히 색이 짙어졌다.  살펴보니 작은 딸기 두 개가 철 모르고 빨갛게 익어 있었다.  손으로 따서 입에 넣으니 살짝 시큼하면서도 달았다.  주변으로 보이는 잡초들을 뽑아가며 무화과에 다가갔다.  무화과는 이미 떨어지거나 매달린 채 말라버렸다.  난삽하게 자란 가지들을 잘라 말려서 장작으로 쓸까 했는데, 아직 이파리들이 다 떨어지지 않아 좀 더 기다리기로 했다.  사과나무와 포도나무는 이파리들이 서서히 말라가고 있었다.  이파리가 다 떨어진 감나무에는 작은 감들이 특유의 색감으로 익어가고 있었다.  그 아래로 심은 천일홍은 아직 꽃이 생생했고, 유칼립투스의 진득한 이파리를 갉아먹던 벌레 하나를 잡아 멀리 던졌다.  남쪽의 경계로 심은 로즈마리 덤불에 뒤뜰로 가는 길이 뒤덮일 판이었다.  가지를 좀 쳐낼까 하다가 내년 봄까지 놔두기로 했다.  그 덤불 안에서 마지막 가을볕에 안간힘을 쓰는 메뚜기와 사마귀 녀석들을 보았고, 바람을 피해 덤불 깊숙이 매달아놓은 사마귀 알집을 보았기 때문이다.  한기 서린 겨울의 바람과 영등할망의 바람이 지나고 나서 정리를 해 주어도 나는 상관없을 일이다.  겨우내 그 바람에 덤불 안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숙제를 짊어진 녀석들에 비하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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